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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누나 Oct 18. 2020

저녁 무렵에 남산 걷기

나는 이천 년대 중반에 대학생활을 시작했던 고로 선배들이 시키는 비자발적 운동을 몸소 체험했다. 월 화 목요일에는 학교 유도장에서 체력 훈련을 하고 금요일엔 남산 산책로에서 넋이 반쯤 나간 채로 달렸다. 3학년에 올라가 자유의 몸이 되면서 ‘젠장, 남산이라면 이제 쳐다보기도 싫다’ 하고 이를 갈았다. 남산이 무슨 죄가 있겠냐마는.


이십대의 끝 무렵부터 아픈 곳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해서 이제는 며칠 운동을 안 하면 온몸이 쑤시고 뻐근해 견딜 수가 없다. 오죽 몸이 안 좋아졌는고 하니, 쳐다보기도 싫던 남산을 내 발로 찾아가 밤마다 한두 시간씩 걷다 오고는 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솔직히 선배들한테 얼차려를 받던 시절에 제일 튼튼했었나 보다고 생각한다.


거추장스러운 물건은 집에 놓고 빈손으로 걷는다. 달과 구름을 관찰하고 고양이와 청설모를 발견하기에는 그러는 편이 좋다. 가끔 어린아이들을 마주칠 때도 있다. 새 나라든 헌 나라든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의 어린이든 일찍 자야 쑥쑥 크기 마련인데. 문득 한 마디 건네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씩씩하게 잘 올라가네, 대단한데.”


어릴 적에 ‘어린이는 으레 어른의 칭찬을 받기 마련’이라고 생각했다. 산에서 만난 어른들은 “정상까지 멀지 않으니 힘내”라든가 “기특하게도 산을 참 잘 탄다” 하며 말을 건넸다. 아직 산 정상에 닿으려면 한참 더 가야 한다는 걸 알더라도 어쨌거나 발걸음을 가볍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낯선 사람을 조심하라고 귀 따갑게 들을 요즘 애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초중고 교과과정마다 한 학기씩 칭찬 수업을 편성하면 어떨까. 이왕이면 수능 필수과목으로도 지정해버리자. 그럼 다들 외우고 쓰고 연습하며 칭찬을 몸에 익히려 하겠지. 칭찬 잘 하고 잘 받기를 미덕으로 여기는 사회로 진일보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아니 잠깐,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이런 알량한 마음으로 정책을 만들다가 공교육이 신뢰를 잃는 지경에 온 걸까.


비자발적 칭찬을 들은 어린이가 어른이 되어 남산을 진절머리 내도록 만들지 않으려면 교육제도는 지금 이대로 두는 편이 낫겠다. 두서없는 생각을 하다 보면 이미 아이들을 앞지른지 오래다. 다시 한번 말해두지만 남산은 아무 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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