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서대문구 미근동에 경찰청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으로 1972년 준공된 서소문아파트가 있다. 그보다 앞서 지어진 좌원 상가아파트(1966년)와 세운상가(1967년)는 더 이상 주거용으로 사용되지 않으니, 서소문아파트야말로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제일 오래된 주상복합 건물이다. 복개천 위로 지어진 건물이라 현행법상 재건축은 못 한다. 그래도 더블 역세권인 오피스타운 귀퉁이에 위치한 덕분에 주거용 상업용 모두 심심찮게 거래가 이루어지는 모양이다.
서소문아파트 1층에는 카페 일곱 개와 밥집 열 개 그리고 편의점과 유리 가게가 각각 한 개씩, 도합 열아홉 개의 점포가 있다. ‘카페, 카페, 카페, (건너) 카페, 카페, (건너) 카페, (건너) 카페’ 하는 식이다. 역사가 유구한 건물 치고 상가의 구성이 꽤나 트렌디하다. 어느 부분이 ‘트렌디’하냐고 묻는다면, ‘티라노 다방’을 제외한 여섯 개의 카페가 모두 외국어로만 간판이 적혀 있는 점에서 그렇다고 해두자.
‘이 좁은 동네에 겁 없이 카페를 또 차려서 어쩌려고 그래?’ 하며 (속으로) 오지랖 넓게 염려하던 일이 무색하게, 일곱 개의 카페가 ‘모닝세트가 있는 곳, 생과일주스 종류가 다양한 곳, 점보 사이즈 아메리카노를 파는 곳’ 등등 각자 명확한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공존하고 있다. 저마다의 매출이나 업주들 간의 분위기까지는 알 수 없으나 일단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다.
모든 카페가 순조롭게 정착했던 건 아니다. 지난해 초여름 ‘홍콩식 밀크티 전문점’을 표방하며 개업한 곳은 가을에 접어들며 점점 오픈 시간을 늦추다가, 급기야 집기류를 그대로 둔 채 영영 문을 열지 않게 되었다. 그 무렵 건너건너 옆에 생긴 ‘디저트 숍’(물론 커피도 팔았다)은 수명이 더 짧았다. 그 뒤 같은 자리에 또 카페가 생겼는데, 이번에는 사람들이 줄곧 장사진을 친다. 모를 일이다. 카페의 흥함과 망함이라는 게 말이다.
실은, 그렇지도 않다. 개점 초기에 한두 번 들러보면 카페의 운명을 얼추 짐작할 수 있다. 달짝지근한 시그니처 메뉴로 승부하려 들거나(이 근처 사람들에게는 당질보다 카페인이 더 필요한데도), 파격적인 가격을 내세우거나(머잖아 생과일주스의 과일 함량을 나노그램 단위로 낮출 거면서), 미근동 디저트 문화를 선도하겠다고 나서(둘러앉아 컵케이크 나눠먹을 분위기의 사무실이 몇이나 있겠나)지만 않으면 된다. 그저 나쁘지 않은 맛에 적당한 가격이기만 하면 충분하다.
‘홍콩식 밀크티 전문점’은 공지도 없이 폐업해버렸고, 세가 금방 나가지 않아 한 계절 동안 간판이 그대로 붙어있었다. 누군가 날마다 문 아래 틈새로 전단지를 밀어 넣었다.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어수선한 풍경에 어쩐지 마음이 스산했다. ‘지금 하는 일이 무슨 의미며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해? 그런 건 없어. 다들 이러고 살어.” ‘저는 미근동이랑 안 맞는 것 같아요.’ “그런 소리 하지 말어. 아니, 오늘 이상하다. 왜 그래?” 나는 예전에 없어진 ‘홍콩식 밀크티 전문점’ 안에 혼자 서 있는 기분이 든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