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퇴근길에 폐지 줍는 할머니를 도와드린 일이 있다. 작은 손수레에 종이상자를 잔뜩 얹고서 건널목을 건너려다 침목에 바퀴가 걸리는 바람에 짐이 쏟아져 버린 듯했다. 가까이 다가가기 전에는 할머니의 존재를 알아챌 수 없었다. 곧 열차가 지나갈 거라 예고하는 차단기가 내려와 있었고, 두툼한 점퍼를 입은 무리가 그 뒤로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차단기 안팎으로 흩어진 종이상자를 그러모으는 할머니가 보였다. 잔뜩 웅크린 채 어깨를 맞대고 선 사람들과 느적느적 움직이는 할머니 사이에는 두 명이 나란히 서도 너끈하게 통과할 정도의 간격이 있었다. 내가 할머니를 도와 짐을 다시 꾸리는 동안 어느 누구도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차단기가 올라가자 사람들은 나와 할머니를 멀찍이 돌아 종종걸음으로 멀어졌다. 다만 손수레가 넘어진 게 아니라 사람이 죽고 사는 일이었대도 인류애를 느낄만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 같다. 어딘가에 몰래카메라가 설치된 건 아닌지 주변을 둘러보다 휴대전화를 꺼내 동영상을 촬영할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사람들은 더 이상 ‘내가 ... 였다면 어떨까, 나라면 .... 할 텐데’ 따위를 상상하고 측은지심을 느끼는 데에 에너지를 쓰지 않게 된 듯싶다. 역사상 지금만큼 인류의 자의식이 팽창한 때가 또 있었을까. 스스로의 굴곡진 인생사는 과잉된 자의식의 먹이로 삼고, 다른 이의 희로애락은 구경거리로 치부한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서사는 편견과 혐오를 불쏘시개 삼아 활활 태운다.
선행 축에도 못 끼는 일화를 구실로 인류애까지 초들고 나섰다. 이쯤 되면 이 글을 쓰려고 할머니를 도와드렸던 게 아닌가 의심한대도 화는 못 내겠다. 그지만 아니래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