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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누나 Jan 04. 2021

누워 헤엄치는 마음으로

내가 다닌 고등학교에는 실내 수영장이 있었다. 1학년 때 일주일에 두 번씩 체육시간에 수영을 배웠다. 학교에서는 졸업생들이 훗날 휴양지에서 수영을 즐길 때나 물에 빠져 위험한 상황을 가까스로 피한 뒤 여고시절을 떠올리고 모교를 추억하리라 기대했을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그 기대에 부응할 수 없으니 애석하다. 학교는 나에게 수영을 가르쳤으나 나는 수영을 익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평영과 자유영을 해내는 동안 나는 물에 뜨지도 가라앉지도 못하고 팔다리를 허우적대며 물살을 더듬어나갈 뿐이었다. 내내 숨을 참으며.


대학생이 된다는 의미 중 하나는 물에 뛰어들어 놀 기회가 많아진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강촌이나 을왕리나 해운대 같은 곳에서 말이다. 그런데 수영을 할 줄 모르고서야 멋도 흥도 나지 않았다. 2학년 여름방학에 집 근처 체육센터에서 매주 사흘씩 수영을 배웠으나 석 달이 지나도록 손에서 킥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수영 못 하는 몸뚱이로 태어났나 보다 하고 단념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후로도 수영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경찰교육원에서 지낸 어느 해 여름에 2주 동안 온종일 수영 훈련만 하는 기간이 있었다. 교육생들은 A, B, C 반으로 나뉘었다. C 반에서 배우다가 물에 뜨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정도가 되면 B 반으로 승급시켜주었기에 C 반의 인원은 점차 줄었다. 끝내 교관이 가르치기를 포기한 C 반의 몇 사람 중에 내가 있었다. 


뜻밖에도 어느 날 갑자기 나는 물에 누워 뜰 수 있게 되었다. 교관한테서 “물에 빠져도 떠 있기만 하면 살 수 있다” 하는 이야기를 들은 뒤였다. 수영장 제일 바깥쪽 레인의 중간쯤에서 한쪽 손으로 가장자리 타일을 붙잡았다. 그리고 수면에 기대듯 몸을 쭉 늘였다. 폐에 공기를 한껏 채우고 타일에서 손을 뗐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힘을 뺐다. 푸- 하고 천천히 숨을 내뱉고, 서둘러 다시 흡- 하며 들이마셨다.


귀가 물에 반쯤 잠기자 주위의 소음도 사라졌다. 귓구멍과 귓바퀴 사이에서 물이 찰박찰박 소리를 냈다. 구름 한 점 없는 한낮의 여름 하늘이 눈앞에 한가득 펼쳐졌다. 가라앉으면 어쩌나 걱정한 일이 무색하게 내 얼굴은 빙산처럼바위섬처럼 드러나 있었다. 거스르거나 휘젓지 않으니 물도 나를 밀어내거나 잡아당기지 않았다. 나는 그저 둥둥 떠 있는 공기주머니였다.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았고 어디로도 갈 필요가 없었다.


이제껏 위나 옆이나 앞으로 나아가려고 애썼던 일이 모두 시시하게 느껴졌다. 벅차고 조금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모르긴 해도, 사람이 죽을 때 이런 기분을 겪게 되겠구나 싶었다. 눈을 감았더니 눈꺼풀 안쪽에 읽을 수 없는 무늬와 빛과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내 몸은 부풀었다 쪼그라드는 폐만 빼고 모두 물에 녹아버린 것 같았다. 어쩐지 그립고 충만한 느낌이었다


두 뺨과 이마에서 찰랑이는 물결의 리듬을 따라 무릎을 옴짝옴짝하며 움직여 보았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하늘이 조금씩 발 아래쪽으로 굴러갔다. 이윽고 수영장 한쪽 끝에 머리가 닿는 순간, 나는 다시 물로부터 육체를 되찾아 건조하고 단단한 세계로 돌아왔다. 그리고 여전히 뜨지도 가라앉지도 않는 몸으로 허우적대고, 물 위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고, 수영장 바닥까지 잠겨 들어갔다 나왔다. 


새해 첫날 아침 잠에서 깨며 문득 ‘물에 누워 헤엄치는 마음으로 올 한 해를 지내고 싶다’ 하고 생각했다. 수영을 못 하는 사람이라도 그런 기분을 흉내 내는 게 무슨 잘못일 리 없다. 위나 옆이나 앞으로 나아가려고 물살을 거스르거나 휘젓지 않고, 하늘 아래 아무 곳으로나 둥둥 떠서 흘러가고 싶다. 침대에 누운채로 2011년 여름 수영장에서 본 하늘을 돌이켜 생각했다. 벅차고 조금은 부끄러우며 그립고 충만한 느낌이 생생했다. 올해는 화내기나 욕도 좀 줄여보겠다고 마음먹었다. 누워 헤엄칠 때는 조급하게 숨쉬지않기가 가장 중요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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