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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누나 Nov 21. 2020

이런 건배사 어떤가요

성인이 된 이래로 술을 꽤나 마시고 술자리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좀 더 유익하게 시간을 쓸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생각은 해도, 이제 와서 돌이킬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신나게 먹고 마시며 떠들었으니 후회할 까닭도 없고 말이다.


음주론을 설파하기에 아직 연륜이 모자란가 싶지만 사견을 좀 늘어놓자면 술자리는 두 종류로 나눌 수 있겠다. ‘건배사가 수반되는 술자리’와 ‘건배사가 필요 없는 술자리’로. 건배사는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평정하고 술잔 비우기의 표준 박자를 제시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건배사를 선창하는 것은 종종 귀찮고 거북한 의식으로 여겨지는 듯하다.


나도 지금까지 인생에서 적지 않은 건배사를 듣고 때로는 읊기도 해 왔지만 ‘순서를 때웠구나’ 하는 정도를 넘어 감명 깊었던 것은 거의 기억에 없다. 돌이켜보면 그냥 “이 멤버! 리멤버!”나 “드숑! 마숑!” 같은 말장난이나 하고 말 걸, 쓸데없이 긴 이야기를 너불댔구나 싶은 때도 있다. 그렇다고 앞으로 인터넷에 떠도는 <분위기 띄우는 건배사 모음> 같은 걸 외우고 다니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경박한 사람으로 보일까 싶은 걱정은 제쳐두더라도(비난하려는 건 아닙니다), 앞 차례 사람이 내가 벼르던 건배사를 해버린다면 낭패를 당할 테니 말이죠.


모두 함께 잔을 맞대자는 신호라면 오히려 술집 한가운데 종을 매달아 “땡”하고 울리는 편이 훨씬 경쾌하련만. 인류가 멸종하지 않는 한, 만국 공통으로 역사가 오랜 건배사 문화가 사라질 리 없다. 그러니 급박할 때 써먹을 수 있는 ‘상비 건배사’ 하나쯤 만들어두면 큰 위안이 될 것이다.


내가 고안한 회심의 건배사 작법(作法)을 여기서 공개한다. 바로 ‘자기 이름으로 건배사 짓기’다. 이 방법을 사용할 때의 장점은 ①다른 사람이 선점할 수 없다(그 자리에 동명이인이 없다는 전제하에). ②핵심어를 잊어버릴 수 없다(자기 이름이 기억나지 않을 만큼 취했다면 애당초 건배사를 시키지 않겠지). ③사람들이 당신의 이름이나 건배사나 또는 이름과 건배사 모두를 기억하게 된다는 것이다(그러니 절대 만취해서 꼴사나운 짓을 하면 안 돼).


위 방법에 따라 나와 친구들이 각자의 이름으로 지은 건배사는 이렇다.

- 김승혜 : 새는 건배사의 공통점은 너무 길다는 겁니다./ 혜가 선창하면 따라 해주세요./ 피!(해피!)

- 박예희 : 수 한 번 주세요/ 쁘니까 예희입니다. 예쁜 제 애교 한 번 보실래요?/ 히히!*(히히히!)

   * 이 때 애교를 시전한다.

- 이지연 :  잔을 마시지 않으면/ 구 끝까지 쫓아갑니다/ 달아 왼쪽부터 끊김 없이 파도!(파도!)

- 조수인 : 지요, 오늘 이 자리?/ 이 술술 들어가지요?/ 간이기를 포기하고 마셔봅시다!(마셔봅시다!)


아무리 애써도 내 이름으로는 안 되겠다 싶은 사람에게는 ‘아시존’을 추천한다. ‘아, 시발. 존나...’라고 생각하시면 큰 오산입니다. ‘름다운 인생/ 간이 아깝지 않은/ 은 사람들과 함께!’랍니다.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 격상이 목전에 있다. ‘건배사가 수반되는’이든 ‘건배사가 필요 없는’ 이든, 모두 술자리는 잠시 미뤄두면 좋겠다. 코로나19로 인류가 멸종되어서야, 아무리 참신하고 감동적인 건배사를 지어낸대도 써먹을 기회가 오지 않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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