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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누나 Sep 06. 2019

누구나 고소장 하나쯤 가슴에 품고 산다

※ 일러두기 : 이 포스팅은 거친 욕설과 저속어를 포함하고 있어 12세 미만 독자의 주의를 요합니다.


때는 어느 토요일, 장소는 저희 동네 대형마트 4층 주차장이었습니다. 요즘 프레쉬배송이다 뭐다 하고 현관문 앞까지 식재료를 가져다주는 서비스가 많이들 생기기도 했습니다마는, 저는 한 달에 두 번 정도 마트에 가요. 언제 배송이 올는지 배송조회 페이지를 끝없이 새로고침 하기보다 마트에 가서 이런저런 상품을 카트에 넣었다 꺼냈다 하며 장 보는 게 더 재미지거든요. 저의 쇼핑 리스트 제1번에 있는 맥주를 인터넷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게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고요.. (도대체 맥주 없이 닭 가슴살을 무슨 맛으로 먹는단 말입니까?)


보통 그런 대형마트는 주차장 출구로 나가는 길을 일방통행으로 정해놓기 마련이잖아요. 거기도 그랬어요. 궁서체로 대문짝만 하게 “출구”라고 쓰고 그 아래 빨간 화살표로 방향을 표시해두었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화살표를 따라 모퉁이로 들어섰죠. 그런데 그때 흰 차 한 대가 그 통로를 역주행해오더니 제 앞에 멈췄어요. 저는 그 차가 ‘아차차 실수’ 하며 후진해서 코너를 되돌아 나갈걸 예상했죠. 아니, 웬걸? 저한테 경적을 울려대는 게 아니겠어요? “빵빵!” 하고. 그래서 저도 응수해줬죠. “빵빵빵!” 제가 아무리 평화를 사랑하고 너그러운 사람이라 한들, 통로는 차 한 대가 지날 수 있는 너비였고 저는 이미 통로에 진입한 상태인데다, 뒤에는 다른 차가 기다리고 있었으니 그 수밖에 없잖아요.


말해두지만 저는 그때 인생이 참 아름답다고 느끼고 있던 참이었어요. 옆에는 스테이크용 채끝살, 뒤에는 보름은 족히 두고 마실 캔맥주가 타고 있는데 못마땅할 일이 무어 있고 섭섭할 일은 또 무어겠습니까. 그래서 흰 차가 후진하는 것을 재촉 않고 느긋이 지켜보고 있었어요. 그럴 수도 있잖아요. 일방통행인 걸 모른 채 역주행하다 다른 차를 맞닥뜨린 경험을 제가 안 해본 것도 아니고, 주차할 자리를 찾으려다 보면 주행 방향 같은 건 무시하고 꼼수를 쓸 마음이 생기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더라고요. 흰 차가 방향을 틀어 후진해 나가다가 갑자기 멈춰 섰어요. 제 앞에 운전석이 마주 보이게 되었죠.


열린 창 너머로 남자가 상반신을 내밀었어요. 그리고 한다는 말이.

“거 양보 좀 못하냐, 씨발! 아주 운전을 좆같이 하고 있네, 씨발!”


나? 나한테 하는 말인가?

창밖으로 나온 남자의 손가락이 찌를 듯이 저를 향하고 있는 모양을 봐서는 저한테 하는 말이 맞는 듯했어요. 저는 ‘뭐라는 거야, 이 새끼가.’라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어요. 대신 유리창을 내리고 점잖게 남자를 달랬죠. 혹시 남자가 듣지 못할까 봐 흉성으로 크게 이야기해주었어요.

“뒤에 차가 있는데 어떻게 양보를 해요? 빨리 가세요.”


그러자 남자가 다시 소리 질렀어요.

“야, 이 씨발! 좀 비켜주면 되지, 씨발년아!”


어휴. 이 붐비는 휴일의 마트 주차장 한가운데서 자기 면 깎아먹는 일인 줄,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욕을 잘도 하네. 아니, 잘하지도 못하는구먼. 단조로운 레퍼토리밖에 없는 주제에. 굳이 욕으로 대결을 하자면 보고 들은 게 많은 제가 이길 게 뻔했지만 마주 대고 쌍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렇다고 겁먹은 것처럼 보이기도 싫더라고요.

“뭐가 씨발이야. 가, 가! 빨리 가.”


제가 가만히 앉아 두려움에 떨며 남자의 차가 멀어져 가길 기다리고만 있을 줄 알았나 봐요. 남자는 당황한 듯,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더니 또다시 손가락질을 하며 외쳤어요.

“씨발년아!!”


가라... 고마해라. 마이 무따 아이가. 그래서 전 경적을 울렸어요. “빵빵!” 이제껏 재촉 않고 기다리고 있던 뒤의 차들을 봐서라도 이쯤에서 물러나면 용서해주마, 하는 생각이었죠. 저한텐 이 일련의 소동이 한 십 년은 되는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안 그렇겠어요? 저의 소중한 소고기와 캔맥주들이 점점 뜨끈뜨끈해져 가고 있었단 말이에요.


그랬더니 남자는, “씨발년아아아아아!!!” 라며, 마치 당장 차에서 뛰쳐나와 저를 한 대 치기라도 할 것처럼 거칠게 안전벨트 버클을 풀 - 이때, 제 머릿속에는 ‘남자가 내 차 보닛으로 뛰어올라올까? 혹시 트렁크에 야구방망이라도 들어있을까? 내가 창문을 닫으면 남자가 창문을 깰까, 앞 유리를 깰까? 차를 계속 세워두면 남자한테 일반교통방해죄를 적용할 수 있을까?’ 하는 오만가지 생각이 오고 갔어요 - 려다 말더라고요.


아, 저는 왜 그다지도 씩씩했던 걸까요. 그때 전 이렇게 말하고 말았어요.

“아저씨, 신고하기 전에 빨리 가세요.”

그러지 말걸 그랬어... ‘어머 어머, 왜 이러시는 거예요. 아저씨... 무섭잖아요...’ 같은 소릴 했어야 하는데. 아무튼 남자는 단말마의 비명처럼 네 번째로 “씨발년아아아아아아!!!” 하고 내지르더니 차를 움직여 나갔어요.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해서 저는 제 차의 블랙박스 메모리카드를 조심스레 꺼냈어요. 그리고 집으로 가지고 올라와 컴퓨터에 꽂아 넣고 파일을 확인했죠. 다행히 마트 주차장에서 있었던 일련의 일들이 영상과 음성으로 잘 저장되어 있더라고요. (내가 신고는 안 했지만, 고소도 안 할 거라고는 한 적 없어요. 아저씨.) 저는 메모리카드의 파일을 바탕화면으로 복사하고서 한글 프로그램을 실행해 남자를 모욕죄로 처벌해달라는 고소장을 써 내려갔죠. 하하하.


아는 년(놈)이 더 무섭다고요? 무슨 그런 사소한 일로 고소장을 쓰느냐고요?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게, 그 남자가 아니라 오히려 저 같다고요? 아니죠, 아니에요, 아닙니다. 제 생각은 이래요. 너한테 하면 안 되는 건 나한테도 하면 안 되는 거예요. 너가 씨발새끼가 되기 싫으면 나를 씨발년으로 만들면 안 된다고요. 공연히 사람을 모욕하지 않기로 한 건 사람들 사이의 약속이잖아요. 형법 제 삼백열한 번째의 약속입니다. (하지만 아저씨, 너는 평소에 약속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지.) 그리고 다른 이야기지만, 분노할 줄 아는 것은 어쩌면 경찰관으로서의 훌륭한 자질이 아닐까요. 분노하는 타인, 억울한 일을 겪은 타인에게 공감할 수 있다는 방증일 테니까요.


만약 이번에 쓴 고소장을 경찰서에 제출한다면 제 평생 처음으로 누군가를 고소하는 일이 될 겁니다. 제가 정말로 모욕 사건을 접수하게 될까요? 글쎄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 일이 일어난 지 벌써 한 달이나 지났거든요. 그간 좀처럼 경찰서를 방문할 짬이 나지 않았어요. 막상 사건을 접수하려니 유쾌하지도 않고, 분노라는 감정도 어떤 행동을 하는 데에 아주 강한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고소장 제출 여부와는 별개로 저는 이번 일을 겪으며 이런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내가 수사를 다시 하게 될 날이 온다면, 이런저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경찰서로 번거로운 발걸음 해서 고소장을 낸 사람들의 사건을 좀 더 성의껏 살펴보겠노라고. 치우침 없이 공정하고 엄격하게 사건을 대하되, 경찰서에까지 오게 된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려 좀 더 노력하겠노라고 말이죠.


남한테 안되는 건 나한테도 안되고, 남한테 허용할 수 있는 건 나한테도 허용해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정의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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