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딸기

by 다락방지기

중학교 때 담임이셨던 체육 선생님이 무슨 이야기를 해주시다 말했다.

-나는 딸기 아빠야.

-?

-딸 하나, 기집애 하나 키우고 있거든.

시시한 농담에 웃음도 안 났는데 그 때 나는 아마도 뜨뜻미지근한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을까. 오래 전 일인데도 딸기하면 떠오르는 일이다. 그 밖에 이야깃거리가 없는 이유야 내가 딱히 딸기를 좋아하거나 찾아 먹지 않아서일 것이다.


반전은, 첫 아이를 임신하고부터 딸기는 내게 특별한 과일이 되었다는 점. 평소 즐겨 찾지 않던 딸기가 얼마나 먹고 싶은지 겨우내 많이도 사다 먹었다. 뱃 속의 아기가 먹고 싶어하나보다 싶어 배를 어루만질 때마다 ‘딸기야’하고 불렀다. 내가 새콤달콤한 과즙을 맛있게 즐기고 있으면 맞은편에 앉아있던 남편은 딸기를 씹지도 않고 삼키는 것처럼 츄릅거리며 순식간에 내 몫을 위협했다.

-당신 딸기 파쇄기같아.


딸기 먹는 모습만큼이나 남편과는 사는 방식이 달랐다. 다르다고 묶일 수 없는 것은 아니라 가족이 된지 얼마만에 딸을 낳았고 태명이 딸기였던 아이는 세상 속에서 불릴 ‘다인’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여러 가지 이름을 떠올려 보았는데 왠일인지 ‘다’라는 글자를 꼭 넣고 싶어 후보에 다인, 다람, 다솔 뭐 이런 것들이 있었다. 사는 방식이 영 달랐던 남편은 꼭 작명원에서 이름을 받아야 한다며 고집했다. 결국 우리 둘의 중간 합의점이 내가 만든 이름 후보들을 작명원에서 좋은 한자로 받아오는 거였다. 그렇게 받아온 한자가 ‘많을 다, 기운 인’.

-내가 생각해 둔 한자는 ‘어질 인’이었는데.

‘기운 인’이라, 나쁘지 않았다. 힘차게 자기 삶을 개척해가는 모습이 떠올라 반갑기도 했다. 원래 가지지 못한 것을 선망한다고, 나는 대체로 지나친 안정을 추구하며 선택하느라 또 다른 기회를 만들지 못한 게 내내 아쉬웠다. 내 아이는 나와 다른 삶을 살게 될 것만 같았다. 아이의 이름은 멋진 대하소설의 표지 제목과 같은 무게감으로 느껴졌다.


꽃나무 시장에 데리고 간 다인이는 딸기 모종을 키우고 싶어 했다. 푸릇푸릇 잎사귀만 가득한 모종들 사이에서 하얀 꽃이 피어있거나, 작은 열매 한 두 개라도 달고 있는 딸기 모종은 단연 돋보였다. 그래. 안될 것도 없지! 딸기 모종 두 개를 담아와 상추와 완두콩 옆에 나란히 심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 년이 지나 이 목재 화분은 통째로 딸기가 차지하게 된다. 귀엽고 앙증맞은 열매에 속지 마시라. 딸기는 아주 강인하고 기운차며 나폴레옹이나 칭기즈칸에 비견할만한 정복자다.


이 정복자 둘의 어린 시절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다. 심은지 얼마되지 않아 하얀 꽃의 향긋함이 사랑스러웠고 꽃이 진 자리는 반드시 열매가 맺혔다. 콩알만하던 열매가 쑥쑥 자라 우리가 아는 딸기의 형태를 갖추면 끝에서부터 붉게 익어간다.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딸기 문안인사 드리는 게 나의 의식이었다. 이제 막 빛이 퍼져나가는, 조금 축축하고 쌀쌀한 아침공기 속에서 쪼그리고 앉아 24시간만에 눈에 띄게 변화한 딸기에 감탄하는 것. 멋진 일이었다. 여러 모종을 심었지만 초보 정원사들에게 단연코 딸기는 변화무쌍하게 자라나, 보는 즐거움, 키우는 기쁨을 주는 효자들이었다. 나의 두 아이는 딸기 열매가 맺힌 걸 보고 연신 놀라워하더니 언제 딸 수 있을까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기다리는 사람이야 애가 타지만 사실 열매 맺히고 오래지 않아 빨갛고 앙증맞은 딸기 대여섯 개를 수확했다. 아이들에게 다 양보하고 작은 열매 하나를 맛보았다. 먹기도 전에 아까웠다. 더 눈으로 담아두고 향기를 맡는다. 그 맛이야 말해 무얼해. 아주 싱싱하고 자연스러운 달콤한 맛과 과즙. 꽃이 더 피지 않을까, 열매가 더 맺히지 않을까 이튿날 아침도 어김없이 문안인사를 드리지만 그 시절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무럭무럭 자란 딸기들은 이제 정복자의 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잎 사이에서 기는 줄기, 러너가 발달하며 쭉쭉 뻗어 나갔다. 기세등등하게 뻗어나가다 러너의 일부가 흙에 닿으면 금세 그 자리에서 뿌리를 내리고 다시 잎이 올라왔다. 새로 올라온 잎에서도 러너가 나와 다시 정복을 시작하고 기존의 러너는 이미 더 멀리 나아가 목재 화분 틈을 통해 밖으로 넘어가기도 했다. 화분 안에서 뻗어나간 녀석들도 트랙을 돌듯 한 바퀴, 두 바퀴... 수 차례 화분을 휘감았다. 완두콩은 진즉 수확했고 딸기와 이웃한 상추들을 솎아 먹고 있었는데 상추들이 자리잡은 곳만 제외하고는 화분이 몽땅 딸기 잎과 러너로 가득 해 넘칠 것만 같았다. 이게 고작 여름 한 철에 이루어진 일이다. 정복자들은 목재 화분 하나를 통째로 차지하고도 모자라 자꾸만 뻗어 나왔다. 처음엔 러너가 나와 뿌리를 내리는 게 신기했다. 생물 시간에 배운 줄기 번식이 이런거구나 하고 놀라웠는데 조만간 감당이 안되는 러너들 덕분에 곤란해졌다.


이들을 멈춘 건 쌀쌀해진 날씨였다. 딸기 잎이 갈색으로 변해가면서 시들더니 동면에 들어갔다. 과연 한겨울을 잘 버틸 수 있을까. 딸기 화분을 그대로 비닐로 덮어 양지바른 곳에서 겨울을 났다. 폭설과 한파. 매서운 바람과 영하의 추위. 겨우내 딸기가 죽었을까 살았을까 문득문득 생각했다. 이듬해 날이 풀리자 시든 딸기 잎 사이에서 초록의 새 잎을 간간히 봤다. 분명 죽지 않았던 거다. 하지만 쑥쑥 자라날 만큼의 힘은 부족했는지 초록의 작은 잎은 더 이상 크지 않았다. 한 여름 칭기즈칸과 나폴레옹을 떠올리게 했던 정복자 딸기들은 그렇게 끝났다. 화려하고 장대한 모든 역사가 시간 앞에 무릎 꿇듯 딸기의 시간도 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우리는 새 봄을 맞아 딸기 모종을 심는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므로.

KakaoTalk_20250613_144854698.jpg 겨울을 이겨내고 쑥쑥 자라는 세 번 째 해의 딸기. 이 목재 화분이 시아버지가 남긴 멋진 유산이지요. 딸기의 힘찬 러너 덕분에 틈새가 벌어져 망가지기 직전이지만, 살려봅니다.
변화무쌍한 딸기의 성장은 참 재미나요. 흐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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