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때에는 불과 1년전에 명칭이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바뀌었을 때였다. 그래서 그런지 어른들 입에는 초등학교보다는 국민학교라는 말이 더 익숙한 그런 시절이었다.
요즘 MZ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90년생의 비극을 얘기할 때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많은 동년배의 숫자로 인한 무한 경쟁의 슬픔이다. 입시때도 많은 숫자가 몰려서 입시 경쟁이 힘들었고, 그정도의 사람들이 취업시장에 뛰어들 무렵엔 취업경쟁으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어쨌든,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때는 한 학년에 반이 14~16개 정도였고 한 반에 40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배정되어있었다. 옛날 교실은 큰 창문이 복도에 나와있는 형태였고, 조그마한 사물함이 하나씩 배정되어 복도쪽 벽에 붙어있었다. 실내화주머니는 복도에 비치된 개인별 보관함에 가지런히 보관을 했던 기억이 난다.
급식이라는 것이 생겼을 때는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때였기에 처음 입학했을 때에는 도시락이 전부였었다. 요즘의 초등학교 풍경을 보면 학부모들이 저학년에 대해서는 통학을 많이 도와주는 것처럼 느껴지는데(필자의 조카들을 보면서 그런것을 알았다) 내가 어렸을때에는 부모님이 학교에 오는 일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만큼 안전했었고, 부모님들이 어느정도 본인의 자식들을 믿었던 것 같다.
아마 저당시의 책상은 2인 책상이었던 걸로 기억하고, 짝꿍을 정해 같이 책상을 공유하는 스타일이었다. 당연히 종종 니꺼내꺼, 니자리 내자리의 유치한 장난과 영역도 나누었고, 저당시는 짝궁을 남/여로 배정했기에 이성이랑 앉게 했었는데 요즘에야 그렇게 한다면 감사합니다, 라고 앉겠지만 우리가 자라던 때에는 학창시절의 연애는 남들에게 말하기엔 부끄럽고 쑥스러운 그런 것이었다. 누가 누구와 이야기를 하거나 손을 잡았다고 하면 얼레리꼴레리를 외치면서 놀리던 시절이었으니 한번 이슈가 되면 두고두고 퍼져서 오히려 책상에 선을 긋고 넘지 말라는 장난을 더 쳤던 것 같다.
당시의 학교에는 전용 체육관도 없었고, 급식을 위한 조리실도 없었다. 그래서 운동장은 온전히 학생들을 위한 것이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운동장은 정말 여기서 축구를 하는 것이 가능한가 싶을 정도로 많은 학생들이 쏟아졌고, 하나의 운동장에서 못해도 8개는 되는 축구경기가 펼쳐졌다. 그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축구를 하고, 부딪히고 그러는데 이게 우리 학년만 쓰는게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서열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고학년 형들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히 해야 했는데 어쩌면 이때부터 우리는 우리의 전세대인 위를 바라보고 눈치보는 이런 삶에 빠르게 익숙해 졌을 수 있었다.
우리의 안내문은 회색빛의 재생지에 인쇄된 인쇄물 들이었다. 선생님들은 그런 종이에 가정통신문이나 안내사항을 적어주었고, 우린 그걸 부모님들에게 가져다 드렸던 것 같다. 학교의 후문에는 낡은 문방구가 늘 위치해있었고 학교의 준비물들, 보통은 실내화부터 미술, 음악에 사용되는 같단한 소모품들이었는데 이런 아기자기한 베스트셀러들과 함께 100원으로 사먹을 수 있는 군것질거리들이 수북히 쌓여있었다. 당연히 이당시 인기의 척도는 누가 더 맛있는걸 살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였다. 100원에 사탕이 30개는 더 들어있는 것들도 많았고 아폴로 등등 나눔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제품들도 많이 있었다.
가끔씩은 육교앞에 병아리를 파는 아저씨들이 오셨는데, 병아리는 500원이었다. 어린시절 우리의 눈에는 병아리들이 정말 귀여워보였고 몇몇 친구들이 샀었지만 아마 오래 못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쨌든 나는 용돈이 없었고 당시 우리 부모님은 나에게 돈을 주지 않으셨기에 내가 뭔가 사먹는일은 없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게 원망스럽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냥 친구들이 먹는거 얻어서 같이 먹고, 그냥 구경만 해도 충분했던 것 같다. 적어도 우리때에는 그런걸로 사람을 놀리고 차별하지는 않았었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그때 군것질을 많이 하지 않았던 것도 내가 어린시절 건강하게 자랐던 비결이 아닐까 싶다.
언제나 넘쳐나는 사람들 덕분에 시설은 언제나 꽉꽉 눌러차는 느낌이었다. 화장실도 소변기가 꽉차있었고, 복도에 비치된 요즘엔 휴게소에 설치된것 같은 대용량 정수기(4~5명이 동시에 먹을 수 있는)에도 사람들이 늘 붐볐다. 당시엔 1회용 컵도 많이 없어서 스텐컵들이 비치되어있고, 이런 컵들이 UV소독기 안에 잔뜩 들어있었는데 아마 그 소독맛인지 알싸한 컵의 맛은 나와 시대를 공유한 사람들은 대부분 기억할 것 같다.
교실의 제일 뒤편, 학급 소식등에 비치된 내용들은 다 우리의 손으로 만들었다. 교실에는 인력이 언제나 넘쳤기에 교실을 꾸미는 것도, 청소하는 것도, 학교의 시설들을 청소하는 것도 학생들의 몫이었다. 요즘엔 그런것 같지 않지만 주번을 정해서 1주일동안 교실의 문을 열고 닫는 것도 정했고, 학예회 멤버들을 만들어서 교실의 뒤를 꾸미는 사람들도 있었고, 식물담당들은 창가에 위치한 식물들을 주기적으로 물을 주고 가꾸는 일을 했었다.
겨울철 라디에이터가 존재했기에 제일 좋은 자리는 창가쪽이었어서 쉬는시간이면 다들 그 근처에 모여서 등을 대고 있었던 것 같다. 아참, 우유 당번들도 특정 시간이되면 학교뒤로가서 우유를 받아와 나누어주는 역할을 했는데 그때 최고의 아이템은 제티였었다. 이건 누군가에게 나눠 줄 수 있는것도 아니라서 가진 사람들은 정말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
학교에 변화가 생긴것은 조리실이 생기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학교 뒤편에 증축을 하면서 각층에 급식차를 보낼 엘레베이터도 설치됐고, 여기서 만들어진 급식들은 급식차에 담겨 점심시간 전에 각 층 복도에 뿌려져 있었다. 당시 우리는 급식당번도 생겼고, 그 친구들의 역할은 수업이 끝나기 조금전에 급식차를 가져와 세팅하고 배식하는 임무였다. 잔반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기억에 잘 나지 않는데 어쨌든 우리는 밥을 교실에서 먹었었다.
밥에 대한 기억은 딱히 특별했던 것은 없는것 같다. 그냥 모두가 그렇듯 맛있는 반찬을 더달라는 투정들과 편식하지 말라는 말들이 기억에 남았을 뿐이다. 다행히 이것과 관련해서 나쁜 기억은 없는것 같다.
아직 이 때에는 핸드폰이란 개념이 없는 시절이었다. 우리의 약속은 구두약속으로 시간과 장소를 정하는 것이었고, 통화는 집전화를 통해서 친구를 찾아야 했던 시절이었다. 요즘에는 핸드폰 없이 어떻게 사냐고 놀랄 수 있지만 어쨌든 그 시절에 우린 그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