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정신의 통전을 통해 협응력을 극대화하다
탐구자 : 저는 인간은 몸과 정신의 조화로운 협동에 의해 놀라운 성과를 달성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중에서 몸은 우리가 존재하는 한 가장 기본적인 도구이며, 정신은 우리의 생각, 감정, 통찰력을 담당하죠.
이 두 요소의 조합은 협응력을 이루며, 우리가 일상에서 보여주는 활동의 핵심입니다. 도널드 위니캇은 항상 몸과 정신의 통전을 최대한 활용하여 협력, 창조성, 의사소통, 집중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프로이트도 몸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강조점을 두고 있지만, 위니캇은 한 차원 높여 이야기한 것 같아요.
분석가 : 맞습니다. 토마스 카일라일(Thomas Carlyle)은 “우주에는 하나의 성전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몸이다. 인간의 몸에 손을 댈 때에 우리는 성소를 만진다”([ON HEROES, HERO-WORSHIP, AND THE HEROIC IN HISTORY], lecture 1, kindle 판, 4205)고 말합니다.
신학자 :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들과 직접 손으로 몸으로 접촉을 하셨습니다. 나병환자에게 친히 손을 내밀어 나병을 고치셨고, 눈이 먼 소경에는 흙에 침을 묻혀서 눈을 비벼 주셨으며, 귀신 들린 아이에게서 귀신을 내어 쫓으실 때에도 손을 잡아 일으키셨어요.
구약에서는 엘리야가 과부의 아들이 죽었을 때 엘리야가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기도하면서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왕상 17:21) 외칠 때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 기록이 있어요.
성경에서 그렇게 기록된 것은 몸을 고칠 때 마치 성소를 고치는 것과 같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분석가 : 아동교육학자인 셀마 프라이버그(Selma H. Fraiberg)는 [The Magic Years]라는 저서에서, ‘접촉의 결여는 양심이 자리 잡는 인간성 안에 큰 구멍을 뚫어 놓는다’라는 경고를 합니다.
탐구자 : 우리나라의 경우, 어른들은 아이를 너무 많이 안아 주면 ‘손탄다’는 말을 하잖아요. 아기가 보채거나 떼를 쓰면 너무 안아주지 말고 자제하라고 경고를 하는 거잖아요. 그건 어떻게 봐야 하는 건가요?
분석가 : 그 말은 아마도 너무 자주 안아 주면, 버릇이 없게 되고 쓸데없이 자꾸 안아달라고 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안아 주지 않는 쪽으로 길을 잘 들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아기는 길들이는 대상이 아닙니다. 아기를 충분히 안아 줘야 할 때는 아무리 많이 안아줘도 결코 지나침이 없습니다.
특히 유아 초기에 충분한 안아주기는 아이가 존재로서 자기 동일성을 획득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것입니다.
탐구자 : 어른들은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일까요? 혹시 시기심의 발로가 아닐까요?
분석가 : 시기심의 발로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 왜냐하면 친정어머니는 그런 말을 할 리가 없고, 대개 그런 말씀은 시어머니가 하는 경우가 많죠.
탐구자 : 그래도 아기가 어느 정도 크면 너무 안아 주는 것도 자제해야 맞지 않을까요?
분석가 : 그렇습니다. 그것은 따로 가르쳐 주지 않아도 그렇게 되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아기가 무거워지기 시작하면서 어머니는 아기를 늘 안거나 업고 있을 수 있는 데에 신체적 한계를 느끼게 되죠. 그때가 6개월이 지나면서부터라고 보면 되겠죠.
탐구자 : 절대적 의존기의 두 번째 과제로 넘어가죠. 위니캇은 사람의 인격의 기본 구조를 이루는 것으로서 몸과 정신 사이에 통합을 이야기하는 것 같더군요.
분석가: 그렇습니다. 아기의 첫 일 년간은 어머니를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기간이기 때문에 어머니는 아기의 몸을 잘 다루어야 합니다.
절대적 의존기에는 어머니와 유아는 두 가지 과제, 즉 ‘통합’의 과제와 ‘인격화’ 과제를 해결해 가는 과정에 있어요. 앞에서 두 장에 걸쳐서 통합에 대해 많은 내용을 다루어왔습니다. 지금은 ‘인격화’의 문제를 다뤄야 하는데, 그 ‘인격화’를 이루기 위한 핵심 내용이 ‘몸과 정신의 통전’을 이루는 일입니다.
탐구자 : 몸과 정신의 통전은 ‘통합되지 않은 상태’에 충분히 머무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 같아요.
분석가 : 물론이죠. 유아가 그 상태를 충분히 머물러서 통합을 이룸으로써, 몸과 정신의 통전의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는 겁니다. 그런 기본 바탕 위에 어머니가 아기의 몸을 잘 다뤄 줘야 합니다. 어머니가 아기의 몸을 다루면서 유념해야 하는 것들 중, 첫째는 아기의 몸의 생생함, 생기발랄함을 활성화시켜 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정신과 신체의 연대형성과 상응하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아기의 몸을 다루는 것이 이런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아기는 공격성을 억압하게 되면서 순응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아기의 리비도는 몸과 정신의 연대를 이루지 못하고 신체 안으로 들어가면서 억압이 되어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아기는 신체에 대해 심리적으로 수치심을 가지게 되고, 내면에 분노를 쌓아두게 되죠. 그리고 신체가 최대한으로 발현되지 못함으로 인한 부작용으로 성적으로 조숙해져 버립니다. 그래서 통합의 문제 못지않게 몸과 정신의 통전의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철학자 : 신체와 정신의 통전의 문제는 철학에서도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근대가 출발할 때 중세와 단절하면서 대단한 발달적 측면을 가져오기도 하였지만, 근대성의 약점으로 작용하는 부분이 바로 ‘신체와 정신의 연대성’의 문제입니다.
데카르트의 심신 이원론은 인간의 인격적 통전을 파괴했을 뿐 아니라, 주체의 비대칭적 비대화를 초래하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엄청난 사회적 악을 낳게 되죠. 그 악은 데카르트 이후 오랫동안 자행되어 오다가 최종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아우슈비츠로 표상됩니다.
탐구자 : 그럼, 제2차 대전이 끝난 후, 이 세계에는 악이 멈춘 것인가요?
철학자 : 그런 뜻이 아니라, 현대인들이 데카르트적 주체 중심의 정신은 아우슈비츠로 귀결되는 것을 보게 되면서, 근대적인 합리적 사고, 보편적 사고, 신과 이성을 중심으로 한 거대담론에 대한 회의를 가지게 되죠.
정신과 신체의 이원론은 세계의 대립적 갈등 구조를 심화시켜 왔고, 그런 갈등 구조가 한 개인의 인격적 측면으로 나타난다면 매우 심각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1960년 대에 리오타르가 포스트모더니즘을 선언하게 됩니다. 주체 중심의 모던 시대는 끝나고 지금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분석가 : 정신분석학적 측면에서는 위니캇 같은 사람이 몸과 정신의 통전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포스트모더니즘보다 훨씬 인격적이고 정서적인 접근으로 심신 이원론에 대한 문제점을 극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위니캇에 의하면, 인간의 심리적, 정서적 문제는 먼저 몸과 정신이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맺는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신과 신체의 관계가 밀접해지기 위해서는 먼저 어머니와 유아의 몸의 밀접한 접촉이 필수적입니다. 위니캇은 모-아간에 접촉의 상실은 ‘자아 왜곡’을 일으키게 된다고 경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