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영역, 중간현상, 중간대상(10)
어머니는 자녀를 사랑하고 미워한다.
아기는 어머니를 사랑하고 미워한다.
어린 시절 친구사이에서 싸우면서 친해진다.
이처럼 '사랑과 미움의 변증법'을 충분히 거친 관계는 성인이 되기까지 이어지면서 '죽마고우'로 불린다..
그런 관계는 아무리 미운 짓을 하고, 심한 욕을 해도 상처받지 않고 허물이 없다.
부부는 서로 사랑하고 미워한다.
건강한 부부간에는 미움을 바탕으로 사랑할 수 있고, 사랑을 바탕으로 미워할 수 있다.
이를 수행하지 못하는 커플은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뿌리 깊은 증오를 품는 역동성을 만들어낸다.
서로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엄청난 증오가 숨어 있다.
이런 관계에서는 서로에게 상당한 오해와 깊은 상처를 남기기 십상이다.
그래서 어느 특정 상황이나 어느 특정 주제가 부각되면 이런 사람은 이상하리만치 비이성적인 감정과 판단을 하게 된다.
이런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도 비일비재하게 나타난다.
알고 보면 그렇게 되는 이유는 '사랑과 환멸의 통합'의 부재 때문이다.
그것은 유아기에 중간영역을 안전하게 경험하지 못한 결과이다.
사랑과 환멸 통합의 부재가 우리 일상에서 일어나면 얼마나 심각한가에 대해 우리 스스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여러 모양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다단계 판매조직에 휘말리는 사람, 이단에 쉽게 넘어가는 사람, 정치적으로 팬덤 상황에 쉽게 말리는 상황 등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매우 합리적이고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는 데 능숙한 개인이 특정 상황에서 갑자기 불합리한 판단과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경우를 종종 목격한다.
예전 동료 중에 눈에 띄는 성공을 이룬 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는 명문대를 졸업했을 뿐만 아니라, 전문적인 경력도 뛰어났다.
그의 뛰어난 능력과 예리한 판단력은 동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당연히 그는 동료들보다 빨리 승진했고, 이는 부러움을 불러일으켰고 많은 사람들은 그가 회사의 미래 CEO가 될 운명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사표를 내며 사라졌다.
몇 달 후 그에게서 만나자고 하는 전화를 받았다.
그의 새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나는 그가 다단계 마케팅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의 사무실은 다양한 제품을 홍보하기 위한 다양한 실험 도구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면서 나를 교묘하게 유혹하는 그의 모습을 보게 되면서, 나는 더 이상 그와 사적인 교류를 하지 않게 되었다.
이단 신흥종교
모태 신앙으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먼 친척이 어느 날 이단적인 종교에 깊이 빠지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 부부는 처음에는 교주가 자신의 자산을 표적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들이 가입한 사이비 종교에서 탈출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동작구의 어느 특이한 이단교리를 전파하는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심지어 어머니까지 설득하여 자신들의 이단 활동에 동참하게 되었다.
평생 독실한 믿음으로 교회를 다니며 권사의 직분까지 받은 어머니는 이상한 교리를 듣고 마음을 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는 '바로 이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새로운 주장을 하는 교회에 헌신하게 되었다.
그 교회의 주장은 북한의 '6월 전쟁설'이다.
그래서 교인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6월 전쟁설'을 가지고 협박하고 회유하고 전도한다.
그렇지만 6월이 지나도 아무런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면 다음에는 북한의 '10월 전쟁설'을 주입한다.
교인들은 어느새 6월 전쟁설은 잊어버리고, 10월 전쟁설을 가지고 주변 사람들을 협박한다.
10월이 지나도 아무 일이 없자, 그다음에는 내년 2월 전쟁설을 주장한다.
교인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또 2월 전쟁설을 믿고 전도한다.
그녀는 수년째 수십 번 속아 넘어가면서도 아무런 의심 없이 늘 새로운 버전의 전쟁설로 업그레이드할 준비가 되어 있다.
말하자면, 언제든지 속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녀가 일상에서 그렇게 멍청하냐 하면, 그렇지 않다.
번듯한 회사의 중간간부로 근무하는 매우 평범하고 합리적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데 이 종교적 신념의 영역에만 들어가면 헷가닥하면서 다른 인격체가 되어 있다.
그녀는 중견 교회의 담임 목회를 하는 작은 아버지에게 자신이 다니는 이단종교의 교리를 설득하기 위해 수차례 심방을 한다.
약 30년 전 쌍용그룹의 대리-과장으로 근무할 때 사회적으로는 한창 정치적 민주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회사에 그동안 없었던 노동조합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나도 직접 창립멤버로 참가도 했다.
평소에 관계의 굴곡 없이 늘 잘 지내던 동료들이 노조에 적극 참여하면서 정치적 색체를 띠면서 갑자기 평소의 인간관계와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여주는 것을 보면서 나는 깜짝깜짝 놀랐다.
그들 중에는 평소 평범하고 다정다감하던 그저 친근한 동료였다가 특정 대통령 후보를 지지하는 중 사회적 정치적 흐름에 편승하면서 예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어느 특정 지역의 사람들이 정치적 색깔이 어떠어떠하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나도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요즘 보면 그것은 특정 지역 사람들의 경향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외의 지역 사람들 중에도 정치적 판단을 할 때만큼은 사람이 평소와 완전히 달라 보이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되었다.
소위 말하는 팬덤정치에 대해 자신의 인격의 경계를 지키지 못하고, 쉽게 합류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문제는 이런 경향성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들은 평소에는 합리적인 사람이고 보편적 사고를 하는 사람인데, 왜 정치적 성향이 개입되는 순간에는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는가?
그것은 좌파만의 문제라든가, 우파만의 문제가 아닌, 어느 쪽이든 극단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마찬가지라고 보면 된다.
보이스 피싱을 당하고 안 당하고는 똑똑하고 안 똑똑하고의 문제가 아니듯이, 이런 이슈도 그런 지적 수준이나 똑똑함의 문제에서 벗어나 있다.
대학교수, 성직자, 대중의 지지를 받는 정치인 등 매우 견고한 지적 쳬계를 갖춘 사람조차도 다단계, 이단 신흥종교, 팬덤 정치에 쉽게 함몰되는 사람들이 그렇게 되는 데에는, 사랑과 환멸의 변증법의 이슈가 있다.
이들이 양면적 입장에 있거나, 두 가지 인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이유는, 사랑과 미움이 통합되지 못한 결과이다.
그들은 사랑(우정, 동료애 등 긍정적 리비도)을 주고받을 때의 모습을 매우 정상적인 모습이지만, 증오(미움, 환멸, 분노의 감정 등 부정적 리비도)가 작동하는 영역에서는 전혀 다른 인격을 보여준다.
두 인격이 통합된 적이 없기 때문에, 둘 사이의 동일성이 없다.
두 가지 인격을 가지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이것은 유아기에 어머니와의 관계, 또는 성장 과정에서 부모-자녀 간의 관계경험의 결과이다.
최태원 회장과 노소영 관장의 차이가 바로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노소영관장은 누가 봐도 사랑과 환멸의 변증법을 통해 통합을 이룩한 사람이다.
그래서 남편이 불륜을 저질러도 가정을 지키는 것에 우선적 가치를 둘 수 있었다.
심지어 불륜으로 낳은 딸을 입양하여 자식으로 키워내겠다는 다짐까지 보였다.
하지만 최태원 회장은 사랑과 환멸의 변증법을 제대로 통과하지 못한 결과, 자신의 미성숙함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말았다.
자신이 '벌거벗은 임금님'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자기가 벌거벗었다는 것에 대한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아는데, 정작 최태원 회장 자신만은 모르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분열된 두 가지 인격, 사랑의 리비도가 작동할 때의 자기 모습과 미움의 리비도가 작동할 때의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다른가에 대한 인식을 못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두 인격을 통합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것이니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아직도 세상의 수치를 당할 일들을 수없이 남겨두고 있다.
이번 일로 자신의 분열된 두 인격을 통합하지 못한다면, 그의 앞으로의 행보 속에서 계속 자신의 더 깊은 수치를 드러낼 일만 남겨두고 있다.
부모-자식 간에 자녀가 성인이 되기 전에 사랑과 환멸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생후 6개월 이후에 엄마가 주는 적절한 좌절, 젖떼기로 극대화되지만, 이에 맞서는 아기의 공격성도 생애 처음부터 시작된다.
아기가 태어나면서 많은 에너지를 가지고 나오는데, 그 에너지에는 두 가지가 섞여 있다.
곧 사랑 에너지와 공격성, 또는 미움의 에너지이다.
공교롭게도 갓 태어난 아기는 사랑 에너지보다 공격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래서 아기는 엄마를 엄청나게 공격한다.
엄마의 사정을 봐주지 않고 엄마 젖꼭지를 마구 빨아댄다.
엄마는 몹시 아프지만, 아기에게 젖을 주기 위해 참아낸다.
아기는 오로지 자기 자신밖에 모른다.
우리는 아기의 이러한 상태를 두고 ‘자기애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자기애적 상태는 비단 젖을 먹을 때뿐 아니다.
똥오줌을 싸고도 뭘 잘했다고 울어댄다.
그런데 엄마는 아이가 만든 이러한 상황을 ‘예쁘다’고 봐준다.
아기는 자신의 공격성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게 엄마가 그런 환경을 만들어 준다.
엄마로서는 아기를 낳는 것, 젖을 주는 것, 배설물을 처리하는 것, 자기중심적으로 이런저런 요구를 하는 것, 말을 할 때쯤 되면 요구하는 대로 엄마가 해 주지 않으면 뒤집어지기도 한다.
자랄수록 순종적이지 않고 엄마를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런 모습이 청소년기가 되면 더 심하게 된다. 이럴 때마다 엄마는 쩔쩔매면서 맞서 싸워낸다.
엄마가 이렇게 해 내는 것은 그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만 하는 것이 아니라, 환멸을 감당해 낸다. 이것이 부모의 역할이다.
즉 자녀가 태어날 때 가지고 온 공격성을 성인이 되기까지 해결해 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인 것이다.
자녀의 공격성을 다 감당해 주면, 자녀의 공격성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으로 변화한다.
이때부터 자녀는 부모에게 진정성을 가지고 순종하고 공경한다.
이렇게 보면 부모가 자녀를 양육한다는 것은 고통의 연속이다.
부모가 자녀를 낳은 것 자체가 짐을 지는 것, 빚을 지는 것이지만 짐과 빚을 져내는 힘은 사랑에서 나온다.
아기 때는 귀엽기만 하던 아이가 ‘미운 5살’ ‘미운 6살’이 되면서 미운 짓을 골라서 한다.
부모는 이렇게 아이의 미운 짓을 받아주고 맞서주는 과정에서 환멸을 겪어내면서 사랑하는 에너지는 더욱 커지고 사랑하는 능력은 더욱 깊어진다.
자녀에 대한 미움은 아이가 사춘기를 겪으면서 더욱 배가된다.
예전에는 내 곁에라도 있었지만, 자꾸 멀리 떠나가면서 약 올리듯 후회하게 만든다.
부모보다 친구를 더 좋아하고 애인이라도 만들면 그 꼴이란 보기가 싫다.
군대 간 아들한테서 편지가 왔는데 이 못된 놈이 애인한테 보내야 할 편지가 엄마한테 잘못 보냈다면 그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엄마의 마음은 매우 복잡하다.
꼴불견에 시기심이 전부가 될 수 없으며, 온갖 애교로 고백하는 사랑 표현은 엄마의 마음을 긁어놓으면서도 사랑스러우며 다행이다 싶기까지 하다. 내 아들에 대해 지금까지 알아왔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면서 엄마는 슬프게 웃는다.
이 정도면 아들에 대한 엄마의 사랑과 환멸아 통합되어 있는 것이다.
부모는 자녀를 충분히 사랑하고 충분히 미워할 수 있어야 한다.
자녀도 부모를 충분히 사랑하고 충분히 미워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
사랑과 미움의 통합을 해낸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의 통합된 인격으로 판단하고 느끼고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