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모임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본인만의 취향이 있는 것 같아. 뭔가 자신만의 확고한 취향이 있다는 건 참 부러운 것 같아.’라고. 나의 취향을 아직 찾는 중이지만 하나 확실한 건 자연으로부터 영감과 에너지를 크게 얻는다. 흙을 좋아하고 특히 비에 젖어 촉촉해진 흙냄새를 맡기를 좋아하며, 나무 기둥을 만지거나 안을 때 시원한 느낌과 특유의 나무가 내는 향을 좋아한다.
무성한 나뭇잎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을 보는 걸 좋아하고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길가에 아무렇게나 핀 풀꽃을 좋아한다. 누군가의 손길로 다듬어진 것이 아닌 바람 따라 날라 온 씨앗이 가벼이 정착하여 피워내는 꽃들에게서 귀여움과 기특함을 느낀다.
나이가 들수록 고요하고 청량한 자연속에서 쉴 수 있는 시간을 쫓아가는 것 같다. 카페를 가더라도 창가로 숲이 보이는 곳으로 찾게 되고 가까이 있는 수목원을 찾는 다거나, 산과 가까이 있는 절을 찾아 고요함을 즐긴다.
예기치 못한 곳에서 마주치는 꽃들을 보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특히 이름 모를 들꽃들이라면 더 반갑다. 시골 할머니 동네에는 수백 년을 살아 온 보호수가 있다. 어릴 적 시골에 가면 나무 기둥을 붙잡고 어떻게든 기어 올라가려고 용을 썼던 나무이다. 어릴 때도 이 느티나무는 나에게 굉장히 거대했는데 놀 거리가 없던 시골에서 나만의 놀이터가 돼 주었다. 굵은 뿌리들이 주변 흙 위로 불뚝 솟아올라와 마치 베게처럼, 의자처럼 모양이 잡혔는데 홀로 뿌리를 베게 삼아 낮잠을 자거나 벌러덩 누워 온 하늘을 다 가릴 것 같은 나뭇잎을 구경했다. 불멍, 물멍 말고 나무멍이다.
또래 친구가 없던 시골에서 보호수는 나의 비밀친구였다. 나무로부터 위안을 받았다. 어릴 때부터 감성이 남달라서 어린애가 하늘 보는 걸 좋아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나 꽃들을 하염없이 보기도 했다. 해가 뉘엿 산 뒤로 넘어가기 시작하면 장작 태우는 냄새가 집집마다 타고 올라왔다. 적당히 선선한 바람이 불고 나무 타는 냄새, 마구간 소들이 우는 소리들과 해가 넘어가며 할아버지 마당이 붉게 물들어가는 장면이 좋아, 대청마루 위에 올라가 어둑해질 때까지 산허리를 보기도 했다.
보호수 나무 기둥에는 꽤나 큰 움푹 파인 구멍이 있었는데 나는 거기에 얼굴을 들이밀고는 속닥속닥 비밀 이야기를 했다. ‘사실은 어제 할아버지 재떨이를 깨트렸어,’ ‘여름방학이 빨리 끝나서 집으로 가고 싶어.’ ‘땅콩 뽑기는 재미가 없어.’ 심각하게 비밀이야기를 털어놓으면 나무는 다 알고 있었다는 듯 열심히 나뭇잎을 흔들어줬다. 분명 그 동구밖 나무는 내 말을 다 알아 듣고 있었다. 아마 그때부터 나무를 좋아했던 것 같다.
얼마 전 오랜만에 내려간 시골에서 보호수를 봤을 때(시골 어르신들은 동구 밖 나무라고 불렀다.) 마음 한 구석이 저릿했다. 보호수 앞에는 못 보던 기념비가 세워져있었고 움푹 팬 구멍은 무언가로 채워져 있었다.
‘나무가 나이가 들고 있구나. 너는 내 어릴 때 비밀 친구였는데. 사실은 몇 백 년 할아버지였구나.’ 나무를 쓰다듬자 나를 반겨주는 듯 했다. 그리고 ‘괜찮다. 다 괜찮아질 거야.’라고 위로해주는 듯했다. 굳이 비밀이야기를 털어놓지 않아도 이제는 눈치껏 다 아는 것 같았다. 사람은 아니지만 생명이 깃든 것으로부터, 나무든 꽃이든 어떤 것이든지 우리가 그것에 애정을 남겼을 때 내가 전한 애정만큼이나 나에게 위로를 준다.
보호수 나무 옆에는 한 무더기 들꽃이 가득 피어있었다. 이름 모를 보라색 꽃들이 허리춤만큼 자라있고 그 속에 주인공마냥 다홍색 양귀비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바람이 부는 대로 비가 내리는 대로 폭염 속에서도 순리대로 자라다 꽃을 피워내는 것들. 그런 꽃들을 보면 나는 나대로 죄책감이 든다. 사계절 따뜻하고 시원한 곳에서 뭐가 그렇게 불만족스러운지, 뭐를 더 얻지 못했는지를 생각하며 살아온 내가 애써 꽃을 피워내는 그 모습에 걸음을 주춤한다.
나도 애를 써서, 뭔가를 해본 적이 있었던가.
‘나는 잘 살아있어요. 여기 내가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어요.’ 하며 자기 존재를 알리는 들꽃처럼 열심히 살아야지. 그리고 꽃을 피워야겠다. 바람에 꺾이는 대신 바람을 안고 흔들리더라도 꽃을 피워내야겠다. 나를 예쁘게 피워내야겠다고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