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못회 [말 못 하는 작가의 회고록] : 안녕
9. 안녕
우리는 같은 단어를 보고, 듣고 있음에도 서로 다르게 해석하고는 한다. 그로 인해 오해와 갈등을 불러일으킨 적이 많을 터였다. ‘안녕’이란 단어도 그러하였다.
‘안녕’이라는 단어에다가 끝음을 살짝 올린다면 만남의 반가움의 표시가 되었고,
반대로 끝음을 살짝 길게 늘어뜨린다면 헤어짐의 표시가 되었다. ‘안녕?’(긍정)과 ‘안녕~’(부정)의 차이점이랄까. 나는 애정 하는 이들에게 안녕이라고 반가움의 인사를 표현하였지만, 듣는 이들은 그것이 무언의 벽을 치는 헤어짐의 신호로 받아들였던 적이 있더랬다.
표현방법이 제한된 얄궂은 단어 한마디 속에, 닿겠지, 통하겠지, 하며 나의 텔레파시를 강렬하게 쏘아붙혔지만, 듣는 이가 귀와 마음을 막아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기 일쑤였다.
나는 그래서 ‘진심은 언젠가는 통한다’라는 말을 귀히 여긴다. 단어 정립과 말소리를 넘어선 그 무언가는 언젠가는 통하리라 믿는다.
허나,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나의 진심을 전하려면 하나하나 요목조목. 논리 정연하게 나열해야 그 진심이 닿게 되더라.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도 거기 속한 바였다. 얼렐레 하며 개소리를 나열하는 작가의 글 따위를 어느 누가 읽어줄쏘냐. 우리는 그렇게 말소리와 단어에 구속되어 있었다. 내 자유로운 생각과 표현이 단어 속에 갇혀서, 하늘을 날 수가 없었다.
나는 카테고리 분류를 대게 어려워하곤 했다. 미래사회에 관한 sf책을 집필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소설’로 분류되더랬다. 나는 의아했다. 소설은 [작가의 상상력을 바탕에 두고 허구적으로 이야기를 꾸며낸 문학 양식]이라고 정의하던데, 나의 책은 상상력과 허구적 이야기가 아니라,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교훈이 담긴 저서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 책이 ‘교과서’ 혹은 ‘종교책’, ‘논문’ 등의 카테고리에 등장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s.f는 왜 science fiction일까. 그것을 미래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얼토당토 한 소리라고 어느 누가 확신할 수 있는가.
다음으로, 이러한 작가의 사이비스러운 요소는 집어치우고 대중적인 카테고리로 이동하여 보자.
우리는 대게 채소나 과일의 카테고리 분류도 어려워한 적이 많을 것이다. 호두, 땅콩은 사실 과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이 과일가게에 있다면 이질감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채소류에 속한 수박이나 토마토, 딸기 따위가 마트 과일코너에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곤 한다. 딱히 이상하다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불완전한 단어 속에서 우리는 그렇게 구속되어 당연하다 느끼고 있었다. 인터넷이 발달한 사회에서 말 한마디가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더라. 무서운 세상이다. 모니터 뒤에 숨어서 나를 모르는 사람들은 나를 비난하곤 한다. 너무 불리한 싸움이지 않은가? 그들은 나의 생김새를 비롯해 잡다한 정보들을 모두 알고 있는데, 나는 그 불특정 다수의 정보를 전혀 알 수가 없음이다. 그렇게 패배할 수밖에 없는 싸움에서, 나는 오늘도 말조심을 하려 한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헤어짐의 부정적인 신호가 아니다. 최대한 상냥하게끔. 모두가 잘 알아들을 수 있게끔 물음표를 확실히 붙여야겠다.
“안녕 물음표 물음표”
우리는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는 법을 배우자. 상대가 오해하지 않도록. 절대
“안녕 물결 물결”
을 사용하여 상대에게 부정의 신호를 주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