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 사회의 대륙 (거짓의 재판소) #12

2장-4. 단상 위의 외침

by 공인멘토



08 : 29 : 55
광장 전광판은 늘 그러하듯 검은 대기 화면에 정지해 있었다.
시민들은 매뉴얼에 따라 바닥의 흰 선 위에 서서 5초간 숨을 고르고,
정각이 되면 고개를 들어 “정의란…” 문구를 따라 읽을 준비를 한다.
바람은 일정했고, 빛은 어제와 같은 각도로 내려 꽂혔다.
그러나 그날 아침의 공기에는 보이지 않는 균열이 떠 있었다.

1. 전광판 하이재킹

가온은 터널 옆 음영 구역에서 프로젝터 장치를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어젯밤 엎드려 땀으로 고친 회선 → 전광판 보조 입력 포트 →
도시 방송망을 0.8초간 우회할 임시 커널.
모듈 LED에 READY=TRUE가 떴다.

08 : 30 : 00
보조 입력이 메인 스트림을 덮어썼다.
도시 전광판이 검은 화면으로 깜박이며,
이어폰이 끊긴 라디오 같은 거친 잡음 뒤—
10년 전의 흑백 영상 틀이 튀어 올랐다.

“정의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숨소리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에단의 목소리가 광장 사운드 폴에 증폭돼 울렸다.
다른 날 같으면 0.3초 내 차단됐겠지만
새벽에 끼워 넣은 지연 패치가 정상 루틴을 5초 완화했다.

2. 6초의 충격

1초—시민들의 눈동자가 일제히 흔들린다.
2초—누군가가 “저게 뭐지?” 중얼대지만 금세 입을 다문다.
3초—스크린 속 에단이 기침하며 침 문대에 기대고 “점수 위에 얹힌 건—죽은 윤리”라 외친다.
4초—어린아이 두 명이 부모 치맛단을 놓고 화면을 가리킨다.
5초—벽면 스피커에 비상 차단 코드가 입력된다.
6초, 영상은 검게 꺼진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여섯 초면 사람의 눈과 귀, 심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3. 첫 목소리

정지 프로토콜에 따라 시선을 떨구어야 할 시민들 중에서
중년 남자 하나가 눈을 들었다.
그에게서 3m 떨어진 여성이 입술을 깨물다 실수처럼 말했다.

“저 말… 아프다.”

단 두 음절, 그러나 광장 AI는 이를 감정 파동으로 기록했다.
주변 점수들의 실시간 그래프가 0.1씩 흔들렸다.

4. 이레 등장

서쪽 출입구가 열리고 검은 제복의 집행관 이레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은색 라펠이 아침광에 번득였다.
이레가 통합 제어 단말기를 조작하자,
전광판 외곽 LED가 붉은 경계선을 두르고
“비인가 송출 차단 완료”고 점멸했다.

“모든 시민은 원위치.
누군가가 감정 선동을 시도했습니다.”

목소리는 침착하고 명확했으나,
광장에 퍼진 미세 떨림을 되돌리진 못했다.

5. 가온의 선언

가온은 터널 옆에서 걸음을 떼어 단상 아래로 나왔다.
센서가 그를 ‘주의 A’ 등급으로 띄워 붉은 사각 테두리를 둘렀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를 앰프처럼 사용해 크게 외쳤다.

“어제 끌려간 노인, 여러분이 외면하던 그분의 평점은 0.00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저를 보고— **‘괜찮다’**고 말했습니다.
그 한마디가 죄입니까?”

그의 음성이 드론 마이크에 잡히고,
프로젝터 스피커가 재대로에서 4 dB를 더 증폭한다.
데시벨 상승. AI가 “감정 강도 0.62” 알람을 띄웠다.

6. 두 번째 목소리

젊은 여성이 한 발 앞으로 튀어나왔다.
손목 점수가 황색에서 적색으로 즉시 바뀌었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질서를 위해 사람을 지우면—
우린 언제 살아 있습니까?”

그 말이 떨어진 순간,
주변에서 고개를 숙이려던 다섯 사람이 다시 고개를 든다.
열 명이 서로의 얼굴을 보고,
스물한 명이 속삭임을 시작했다.

7. 시스템 vs 숨소리

광장 제어 AI: 감정 파동 Δ0.9 → “동시 감점 절차” 준비


보안 팀장: “집행관님, 일괄 감점? 격리 명령?”


이레: 손을 들어 제지.

그는 단상에 올라서 마이크를 잡았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가온의 시선을 외면하지 못했다.

“감정은… 질서를 흐립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광장 상공에서
누군가가 휴대 단말기로 보조 회선에 “듣고 싶다”란 짧은 텍스트를 송신했다.
예비 주파수가 전광판 스피커 우선권을 다시 빼앗았다.
이번엔 아무 음성도 아니고, 세 글자만 화면에 뜸.

듣고 싶다

8. 침묵의 역전

스피커가 꺼졌다.
경고 LED도 꺼졌다.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쉭— 하는 동시흡기(同期吸氣)의 소리.
그 소리가 도시가 잊어버린 **‘집단 호흡’**처럼 광장에 울렸다.

이레는 라펠을 쥔 손에 힘을 줬다.
금속이 파지직하고, 반복 없이 떨렸다.
그의 심박이 60을 넘겨 64까지 뛰었다.
센서는 알람을 띄웠으나, 실행할 명령이 없었다.
왜냐하면—집행관 자신이 기준을 흔들리고 있었으므로.

9. 가온의 마지막 한마디

가온은 군중을 천천히 둘러봤다.
누군가는 아직 두려워했고,
누군가는 울었고,
누군가는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숫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는 더 말하지 못했다.
말할 필요가 없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들의 숨소리,
지금 이 순간 그 자체가
정의의 재탄생을 증명하고 있었다.

10. 0.00 % — 최초 기록

도시 AI는 새 항목을 기록했다.
“광장 감정 파동 Δ1.7, 사상 첫 진폭 초과.
그러나 동시 폭력·소란·물리 충돌 0 건.
0.00 %.”

숫자가 증명하지 못한 것
숫자가 처음으로 거꾸로 증명한 순간이었다.


광장은 말없이,
그러나 완전히 새로운 호흡으로,
하루를 다시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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