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 교실 앞 복도가 북적였다. 아이들이 삼삼오오 짝지어 급식실로 향하거나, 다음 수업 준비로 우르르 몰려다녔다. 소란스러운 웃음소리, 발자국이 부딪히는 규칙 없는 리듬, 교과서가 엎어지며 탁탁 울리는 소리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 복도 한쪽에서 민석이 허겁지겁 종이뭉치를 뒤적이고 있었다. 알록달록한 자료들이 바닥에 흩어지고, 손에 쥔 프린트는 제멋대로 구겨졌다.
이천재는 멀리서 그 장면을 주의 깊게 지켜보다가, 마음속에 이상한 충동을 느꼈다.
‘지금 저건 효율적이지 않다.
도와주면 자료 정리가 더 빠를 것이다.
그리고… 내가 도와도 된다.’
천재의 발걸음은 흔치 않게 스스로 움직였다.
늘은 아니었다. 보통 그는 누군가의 요청이 있어야 움직였고, 자발적인 제안은 ‘필요 없는 낭비’로 판단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민석의 허둥대는 모습이 눈에 걸렸다.
민석은 늘 사람들의 중심에 있었고, 자신에게 먼저 말을 걸어주던 몇 안 되는 친구였다.
그래서일까. 이번엔 먼저 말을 꺼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민석 앞으로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도와드릴까요?”
순간, 민석이 고개를 들었다. 흩어진 머리칼 사이로 땀방울이 반짝였다. 민석은 천재의 얼굴을 보고, 잠깐 눈이 커졌다. 그러더니 특유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 아… 됐어. 너랑 얘기하면 피곤해~”
민석은 말끝에 일부러 과장된 한숨을 흘리며 웃어넘겼다. 주변에 있던 두어 명의 친구들이 그 말을 따라 웃으며, 장난 섞인 시선을 천재에게 보냈다.
천재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는 민석의 웃음을 데이터처럼 분석하려 했다. 하지만, 해석이 즉시 나오지 않았다.
‘나는 지금… 거절당했는가?
도움은 필요하지 않은가?
그런데 왜, 피곤하다고 말했지?’
머릿속은 빠르게 회전했지만, 가슴은 뻐근하게 느려졌다.
말의 내용은 장난 같았다. 그러나 그 순간, 가슴 한쪽이 묘하게 눌린 듯 무거워졌다.
주변의 웃음소리가 더 크게 울려 퍼졌다. 평소라면 잡음으로만 기록했을 소리인데, 지금은 자신을 향해 몰려드는 듯했다.
천재는 민석에게 대답하지 못한 채, 그대로 서 있었다.
민석은 다시 종이를 주워 담으며 다른 친구와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무렇지 않게.
그 한마디를 남기고, 그는 그냥 지나갔다.
천재는 복도에 홀로 남았다.
손끝에 남은 미세한 진동, 목구멍에 걸린 설명할 수 없는 막힘.
그는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다가간 자신의 발걸음이 되돌아온 순간을 경험하고 있었다.
민석의 웃음소리가 사라진 뒤에도, 복도에는 여전히 다른 아이들의 발걸음과 웅성거림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천재의 귀에는 그 소리들이 한 덩어리의 잡음처럼 뭉쳐 들어왔다. 분명히 분리 가능한 수십 개의 목소리와 발자국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하나의 두꺼운 막처럼 귀를 눌렀다.
천재는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바닥 타일 위에 가지런히 모인 신발 앞코가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지금 단순히 거절당한 것뿐이다.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 것일 뿐이다.
그런데 왜… 심장이 불필요하게 두 번 더 빠르게 뛰었지?’
그는 숨을 고르려 했지만, 호흡이 매끄럽지 않았다.
목구멍이 조여들 듯 답답했고, 손끝에 자꾸 힘이 들어갔다.
본인은 그저 사실을 정리하려 했을 뿐인데, 몸은 이미 ‘이상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도왔을 뿐이다.”
속으로 되뇌는 말이 자꾸만 공허하게 울렸다.
그때 복도를 지나던 두 친구가 힐끗 천재를 보며 민석의 흉내를 냈다.
“너랑 얘기하면 피곤해~”
말 끝을 길게 늘이며 깔깔 웃었다.
천재는 그 말에 즉각 반응하지 않았다. 다만, 가슴 한가운데가 움푹 꺼지는 느낌을 받았다.
‘저 말은 사실이 아니다. 나는 불필요한 잡음을 늘어놓은 적 없다.
그런데 왜… 모두 웃고 있지?’
그는 차갑게 논리를 정리하려 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아무 해석도 붙지 않았다.
머리로는 ‘농담’이라는 단어를 알고 있었지만, 그 농담이 자신에게 남긴 감각은 농담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마치 종이에 번져드는 잉크처럼, 가슴속 깊숙한 곳에 작은 얼룩을 남겼다.
지워지지 않고, 스스로 계속 퍼져나가는 얼룩.
천재는 자신도 모르게 복도의 벽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낮게 중얼거렸다.
“피곤하다는 말은 사실인가?
아니면… 그저 웃음을 위한 장치인가?
그렇다면 왜, 나는 웃지 못했지?”
논리적 질문은 이어졌지만, 그 어떤 답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 안에는 답 대신, 설명되지 않는 묘한 통증이 남아 있었다.
농담일 뿐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더 날카롭게 가슴을 찔렀다.
다음 날 아침, 교실 문을 열었을 때 민석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늘 그렇듯 친구들 사이에 서서 장난을 치고 있었다. 볼펜을 입에 물고 “나 마이크 들었다!”라며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자, 주변에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예전 같았으면 천재는 그 모습을 곁눈질하며 단순히 ‘민석의 사회적 영향력’을 데이터로 기록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 웃음소리가 교실의 공기를 따뜻하게 채우고 있음에도, 천재의 발걸음은 멈칫했다.
자기도 모르게 복도에 서서, 아이들이 다 흩어진 뒤에야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왜… 지금 들어가지 않았지?’
머릿속에서 질문이 생겼지만, 곧 지워졌다.
대신 가슴 한편에 남아 있는 건 설명되지 않는 ‘피하고 싶다’는 충동이었다.
점심시간에도 그 충동은 반복됐다.
민석이 웃으며 다가와 “야, 오늘 급식 괜찮지 않냐?” 하고 말을 걸었을 때, 천재는 무심하게 “보통 수준입니다”라는 짧은 답만 남겼다.
민석은 어이없다는 듯 웃고는 다른 친구들에게 가버렸다.
천재는 자신이 평소처럼 대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바로 인식했다.
그의 손은 식판 가장자리를 괜히 더 꽉 잡고 있었고, 눈은 민석을 보지 않으려 애써 다른 곳만 향했다.
‘나는 지금… 그를 피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좋아했었다.
이 두 가지는 모순인가?’
천재는 논리의 테두리 안에서 이 모순을 정리하려 했지만, 감정은 논리를 비웃듯 계속 다른 방향으로 몸을 이끌었다.
민석을 보면 대화하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목구멍이 막히는 듯 답답했다.
그래서 대화를 단축하고, 눈을 피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지켜내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무시가 아니었다.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는 자기 보호의 행동이었다.
마치 뜨거운 불에 손을 대지 않으려 무의식적으로 물러서는 것처럼, 천재는 민석의 웃음을 향해 스스로 거리를 두고 있었다.
수업 종이 울리고, 교실 안은 한순간 술렁였다.
민석은 늘 그렇듯 장난을 치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칠판 앞에서 선생님이 잠시 자리를 비우자, 그는 분필을 손에 들고 친구 얼굴을 흉내 내듯 그림을 그렸다.
“야, 이거 너잖아!”
친구들이 배를 잡고 웃었다.
과거의 천재라면 그 웃음을 바라보며 ‘민석은 유머 감각을 통해 집단 내 지위를 확보한다’라고 기록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천재의 눈에 그 장면은 달리 보였다.
분필 가루가 공중에 흩날리는 모습이 산만하게 느껴졌고,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그저 웃음을 나누던 모습이, 마치 질서를 방해하는 소음처럼 들렸다.
심지어 민석의 활짝 웃는 얼굴마저 얄미워 보였다.
천재는 펜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노트 가장자리에 알 수 없는 낙서가 이어졌다.
‘이건 왜 이렇게 거슬리지? 예전에는 재미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머릿속으로 감정을 정리하려 했다.
‘나는 민석을 좋아했다. 하지만 지금은 불편하다.
그렇다면 이 감정은 ‘좋아함’의 반대, 즉 ‘미움’인가?’
그러나 곧 스스로 반박했다.
‘아니다. 나는 그가 잘못한 것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행동은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 달라진 것은… 나다.’
천재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몸은 이미 반응하고 있었다.
민석이 또다시 농담을 던지자, 다른 친구들은 웃음으로 호응했지만, 천재의 입술은 굳게 닫혔다.
눈은 책상 위에 고정되어 있었으나, 귀는 자꾸 민석의 목소리에만 꽂혔다.
그는 속으로 되뇌었다.
‘좋아했던 사람이 더 이상 좋아 보이지 않을 때, 그것을 미움이라고 부르는가?
아니면 단지… 실망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책상 위 연필심이 부러지며 작은 소리를 냈다.
천재는 손을 멈추고 잠시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감정은 상대가 바뀌지 않아도, 내 마음이 바뀌는 순간 달라진다.
그렇다면 미움은 사랑의 반대가 아니라… 변형된 사랑일지도 모른다.’
교실 창가로 들어온 햇빛이 분필 가루를 반짝이게 했다.
천재는 그 속에서 민석의 웃음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활기차고,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웃음.
그런데 지금은 그 웃음이 이상하게 불편했다.
그는 노트 위에 조용히 글자를 적었다.
“나는 그를 싫어한다.”
그러나 곧 펜을 멈추고, 작은 물음표를 붙였다.
정말 싫은 걸까?
민석이 한 말이 자꾸 귓가를 맴돌았다.
“너랑 얘기하면 피곤해.”
농담처럼 뱉은 말이었지만, 그 한마디가 깊게 남아 있었다.
천재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왜 그 말이 이렇게 마음에 걸릴까?
그건, 민석을 좋아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 관심 없는 아이가 같은 말을 했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하지만 민석은 달랐다.
늘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주던 존재,
처음으로 자기가 스스로 도움을 주고 싶다고 생각했던 대상이었다.
좋아했기 때문에, 그만큼 상처도 커졌다.
천재는 속으로 정리했다.
‘나는 갑자기 그를 싫어하게 된 게 아니다.
좋아했던 마음이, 상처를 받아 다른 모습으로 변한 것이다.’
민석이 교실 뒤에서 또 한 번 크게 웃었다.
예전 같으면 함께 따라 웃었겠지만,
지금은 그 웃음이 날카롭게 가슴을 찔렀다.
천재는 눈을 감고 그 차이를 곱씹었다.
그리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가장 미운 사람은, 한때 가장 좋아했던 사람이다.”
그는 펜을 들어 노트에 또박또박 적었다.
“좋아함과 미움은 서로 반대가 아니라,
같은 줄 위의 다른 끝일지도 모른다.”
밤이 깊었다.
책상 위 스탠드 불빛이 노트 위로 둥글게 번졌다.
이천재는 펜을 들었지만, 쉽게 글씨가 나오지 않았다.
오늘의 감정은 평소처럼 간단히 정리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첫 줄을 적었다.
감정 관찰 보고서 13호
오늘 나는 민석에게 도움을 제안했다.
그는 웃으며 “너랑 얘기하면 피곤하다”라고 말했다.
주변은 웃었지만, 나는 웃지 못했다.
논리적으로는 장난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내 마음은 무겁게 남았다.
펜이 멈췄다.
천재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글을 이어갔다.
나는 민석을 좋아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말이 나를 아프게 했다.
좋아하는 마음이 상처를 입자, 그것은 싫음과 비슷한 감정으로 바뀌었다.
이것이 미움인가, 실망인가, 아니면 단순한 자기 보호인가?
천재는 보고서 한쪽 여백에 화살표를 그려 넣었다.
‘좋아함 → 상처 → 싫음’
그리고 옆에 작게 적었다.
“이것은 흐름인가, 변형인가?”
마지막 문장은 쉽게 써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망설인 끝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미움은 좋아함의 반대가 아니다.
좋아함이 흔들릴 때 생기는 그림자다.”
펜촉이 종이 위에서 멈추자,
천재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오늘의 보고서는 그렇게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