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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공무원, 속내를 읽는 것이 곧 능력

눈치의 기술과 의전의 무게

by 공쩌리
가끔 저런 팝업창이 뜨곤하는데, 별 실효성은 없는 듯하다. 한번은 너무 공감되서 사진을 찍어본 것. '상사 수발이 먼저인 조직문화, 공멸의 신호탄!' 꽤 직설적이다 하하


공직사회에 발을 들여놓고 나서, 나는 보이지 않는 관행에 갇혀버린 느낌이었다.


입직 전 근무했던 회사에서는 속도와 정확성이 우선되었지만, 여기는 상사의 의중을 읽는 것이 더 중요한 듯했다.


이곳에서 내가 배워야 할 것은 단순히 업무와 관계뿐만 아니라, 그 속에 '숨겨진 규칙'들이다.


# A는 A가 아닌 조직, 속내를 읽어내는 능력이 필요해!

입직 전 일하던 회사에서는 일이 특성이 예민하고, 그 어떤 곳보다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되었다. 속도와 정확성이 중요한 곳이었기에 A를 지시하면 A를 곧장 이행해야 했다.


하지만 공직사회는 달랐다. 여기는 누가 더 상사의 의중을 잘 헤아리느냐, 그리고 어떻게 하면 내가 옆사람보다 미묘하게라도 앞설 수 있냐가 중요한 곳이다. 상사의 '괜찮아'를 절대 괜찮다고 받아들이면 안 된다.


앞자리의 동료가 자기가 담당하는 민원실의 수도 배관에서 물이 새고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도와줄 거 없냐고 물었지만, 별일 아니니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몇 번이나 물었지만, 거의 다 수습이 되었다며 괜찮다고 했다. 다른 동료들도 알겠다고 하며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하던 업무에 다시 집중하다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사무실이 텅 비어있는 것이다... 불길한 예감에 달려갔다. 그곳은 물바다였고, 모든 직원들이 걸레질을 하고 있었다... 한사코 나에게 오지 말라던 담당자와 알겠다던 다른 동료들 모두... 언제 조용히 하나 둘 이곳에 온 걸까?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나를 빼고 그들만 내려가서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 어쩌면 정말 나에게 부담을 안 주려고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정말 순수하게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했었던 입장에서는 억울함과 서운함이 밀려왔다.


이 사례뿐 아니라 조직생활 전반에서...

A는 A가 아니고, B인지 C인지 고민하며

그 속내를 파악하느라 에너지를 비효율적으로 낭비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 직접 할 수 있는 것을 대신해 주는 것이? 의전! 이런 것까지 해드려야 한다고? 의전!

모든 직장에는 계급이 있고, 질서유지를 위해서 위아래 서열은 필요하다. 하지만, 공직사회는 유독 심하다. 예의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엘리베이터 문을 잡아드리고, 식당에서는 물 수저젓가락 세팅, 다 같이 걸을 때 막내는 맨 뒤에서, 상사가 '아~ 추운 것 같아' 말만 해도 알아서 창문 닫고, 난방기 온도 올리기 등... 매일매일 과장님의 커피를 내려드려야 하는 건 물론이고, 퇴근 전 텀블러 세척까지 해드려야 한다. 직장에서의 모든 시간은 미어캣처럼 긴장하고 당장 튀어나갈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새로 오신 과장님께는 사무실 이용법이 대령되었다.

내용은 청사 여는 시간부터 닫는 시간, 식사 시간, 카페테리아 이용법, 화장실 위치, 세콤 사용법까지...

어라... 내가 입직했을 땐 아무도 안 가르쳐줘서 그때그때 알음알음 눈치껏 물어보며 알아냈던 것들이다...

아... 이렇게 다 한 번에 알려줄 수 있는데 안 알려줬던 거구나...


도어록 비밀번호를 알려드릴 때 과장님께서 "#을 먼저 누르나 *을 먼저 누르나?" 나지막한 이 한 말씀에 곧장 1층 출입문으로 튀어나가셨던 주사님... 그냥 퇴근길에 과장님 본인이 직접 눌러보면 될 일 아닌가...?


# 잔반통에 담긴 예우? 비공식적 위계질서

공무원 조직은 겉으로 보기엔 명확한 직급 체계와 복무 기준에 따라 움직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직책이나 고용형태와 무관한 ‘비공식적 위계질서’가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전문직이나 연장자처럼 사회적으로 권위를 가진 사람에겐 정규직인지 기간제인지와 상관없이 과도한 예우가 따라붙는다.


우리 과에는 70대 전문직 기간제 근로자가 근무 중이었다. 같이 식사를 했던 어느 날, 나의 상사는 그분의 식판을 정리하고 잔반까지 본인의 식판에 덜어 처리하고 있었다. 순간 납득이 되지 않았다. 단순한 예의나 배려라고 하기엔 과했다. 왜 그분의 식판에 남은 음식물까지 정규직 공무원인 우리가 처리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고,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묘하게 불편했다.


그는 정규직도, 직속 상사도 아니었고, 오히려 우리가 복무 관리와 급여를 담당하는 입장이었다. 공식적 관계를 뛰어넘은 직업적 권위가 만든 보이지 않는 위계는 그렇게 일상의 작은 행동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누구도 거스르지 않는 어떤 질서가 있었다. 그 안에서 나는 전문직 직업과 연령이라는 이유만으로 더 많은 대우를 받는 그와, 이유 없이 더 많이 감내해야 하는 나 사이의 불균형을 체감했다.



정해진 규정보다 더 견고한 건 말없는 관행이다.

신입 공무원이기 때문에 경험이 부족해서... 늘 서툴고 실수했다.


몰라서 못한 일에도 무언의 질책을 느꼈다.

겪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기에 억울했고, 불필요해 보이는 절차와 암묵에 지쳐갔다.


눈치 보다 정확성과 효율이,

의전보다 대화와 평등이 통하는 조직이 더 발전적이지 않을까?


하지만 "로마에선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이 현실이었다.

신입인 나는 그 문화를 바꿀 힘도, 거스를 용기도 없이 그저 익숙해지는 법을 배우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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