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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정환 Mar 28. 2022

그 날의 그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소년이 온다

어떤 이유에서인지(그들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본인들을 위해서인지) 정확힌 모르겠으나, 그날의 그들 중 누구를 통해 그들 중 다른 누군가를 기억.. 아니 기록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누군가의 고통과 그 누군가와 같은 경우로 고통 받는 또 다른 누군가의 고통이 똑같을거라는 사고는 어쩌면 너무 일차원적이며 배려없고 위험하지 않는가. 그 어떤 수식어가 "다른 사람의 고통"이란 말 앞에 붙는다 하더라도 그 고통의 크기를 감히 가늠하려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김진수의 죽음을 심리적으로 부검하고 있다는 선생의 말을 나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지금 내 말들을 녹취함으로써 김진수가 죽어간 과정을 복원할 수 있습니까? 그와 나의 경험이 비스했을지 모르지만, 결코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그가 혼자서 겪은 일들을 그 자신에게서 듣지 않는 한, 어떻게 그의 죽음이 부검될 수 있습니까?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색 전구가 하나씩 나가듯 세계가 어두워집니다. 나 역시 안전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선생에게 묻고싶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부마항쟁에 공수부대로 투입됐던 사람을 우연히 만난 적이 있습니다. 내 이력을 듣고 자신의 이력을 고백하더군요. 가능한 한 과격하게 진압하라는 명령이 있었다고 그가 말했습니다. 특별히 잔인하게 행동한 군인들에게는 상부에서 몇십만원씩 포상금이 내려왔다고 했습니다. 동료중 하나가 그에게 말했다고 했습니다. 뭐가 문제냐? 맷값을 주면서 사람을 패라는데, 안 팰 이유가 없지 않아?
베트남전에 파견됐던 어느 한국군 소대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들은 시골 마을회관에 여자들과 아이들, 노인들을 모아 놓고 모두 불태워 죽였다지요. 그런 일들을 전시에 행한 뒤 포상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 중 일부가 그 기억을 지니고 우리들을 죽이러 온 겁니다. 제주도에서, 관동과 난징에서, 보스니아에서, 모든 신대륙에서 그렇게 했던 것처럼, 유전자에 새겨진 듯 동일한 잔인성으로 잊지 않고 있습니다. 내가 날마다 만나는 모든 이들이 인간이란 것을,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선생도 인간입니다. 그리고 나 역시 인간입니다.날마다 이 손의 흉터를 들여다봅니다. 뼈가 드러났던 이 자리, 날마다 희끗한 진물을 뱉으며 썩어들어갔던 자리를 쓸어봅니다. 평범한 모나미 검정 볼펜을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숨을 죽이고 기다립니다. 흙탕물처럼 시간이 나를 쓸어가길 기다립니다. 내가 밤낮 없이 짊어지고 있는 더러운 죽음의 기억이, 진짜 죽음을 만나 깨끗이 나를 놓아주기를 기다립니다.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이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나는 어떠한 대답도 감히 하지 못한다. 그저 그들의 상처에 대해서 내가 우리가 해야하는 일은, 할 수 있는 일은 검열로 인해 이미 검정 잉크로 도배 되어버린 가제본을 다시 그 전으로 고치려하는 것이 아니라, 서 선생처럼 그것이 ‘더 이상 젖지 않도록 들어올리는 것’ 정도가 아닐까라는 생각밖에 할 수 없다는 것에 안타까움과 무기력함을 느낄 뿐이다.



서 선생의 손이 날렵하게 가제본을 들어올린다. 그것이 젖지 않도록. 그 지워진 책 속에 아직 무엇이 남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부끄럽고 창피하게도 사회나 역사와 담을 쌓을 수 밖에 없었다는 이런저런 핑계들로 애써 노력하지 않았다. 그것도 겨우 영화에서나마 그마저도 유희의 목적으로만 접했던, 그날과 그날 이후의 그들의 삶에 대해서 조금은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고귀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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