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일을 할 때 나는 '나없으면안돼병'이 있었다. 직업 특성상 연차를 쓰기 어렵기도 했지만 나는 내가 없는 교실을 극도로 두려워했다. 아무리 아파도 꾹 참고 출근해 아이들 하교시간까지 버티고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도 최소한의 휴가만 쓰고 출근했던 나였다. 신혼여행과 코로나로 출근하지 않았을 때도 쉬는 내내 나는 계속 불안해했다. 어디서 전화나 문자가 오진 않은지 수시로 확인하고 나 없는 교실이 얼마나 엉망일까를 염려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웬걸 나 없이도 너무도 잘 돌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그때서야 그게 나의 큰 착각임을 알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여전히 그 착각 속에서 육아한다. 내가 없으면 안될 거 같은 그 착각. 그래서 자유부인하며 남편이나 부모님께 맡기면서도 늘 마음이 편치 않다. 아기 봐줄 테니 잠깐 눈 좀 붙이고 쉬라는 주변의 말에도 잠안온다며 또다시 거실로 나와 아이들과 놀아준다. 아이와 떨어져 있으면 불안하다. 걱정된다. 분리불안이 있는 건 아이가 아니라 오히려 내 쪽에 가깝다.
첫째 어린이집 보낼 때도 초반 몇 달간은 마음이 상당히 싱숭생숭했다. 태어나서 18개월까지 나는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알았다. 언제 밥 먹고 무엇을 얼마나 먹었는지, 언제 낮잠을 얼마나 잤고 오늘 어떤 일과를 보냈는지. 아이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던 내가 하루아침에 백지상태가 되자 그 기분이 정말 이상했다.
지금이야 키즈노트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사진과 함께 올라오고 아이와의 대화를 통해 대략적인 것을 알 수 있지만, 적응기간 동안에는 키즈노트가 잘 올라오지 않았고 아이가 지금처럼 능숙하게 말하지 못할 때여서 더 그랬다.
어린이집에 보낸 후 나 역시 아이와의 분리를 적응하는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제는 내가 아이의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굉장히 이상하게 느껴졌다. 앞으로도 차츰차츰 더 많이 아이는 나에게서 멀어질 것이 당연하고 그것이 옳고 바른 것임을 알지만 마음이 아렸다. 내 품에서 벗어나 하나씩 독립적인 존재가 되어가는 모습이 대견하면서도 아쉽다고 해야할까. 서글프 다고해야 할까. 훅훅 지나가버리는 이 시절이 벌써 너무 그립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나는 두 아이 옆에 꼭 붙어있다. 오른손은 둘째 엉덩이를 토닥거리고 왼손은 첫째의 손을 잡아준다. 콧김과 입김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에 마주 누워 있다 보면 새근새근 숨 쉬는 소리가 들린다. 옆에 누워 휴대폰 보다가도 심심하면 두 아이의 평온한 얼굴을 살펴본다. 자는 모습이 천사가 따로 없다. 비록 같이 자면 이앓이와 악몽으로 깰 때마다 아이들을 달래주고 쪽쪽이와 애착이불셔틀을 하느라 내 수면의 질은 무척 떨어지지만 같이 자야 내 마음이 편하다. 아이들 숨소리와 따뜻한 체온이 나의 잠자리를 더 포근하고 아늑하게 한다. 분리수면도 어쩌면 아이들이 아니라 내가 준비가 안 된 걸 지도 모른다. 나중에 이다음에 분리수면을 하게 되면 수면의 질은 높아졌을지 몰라도 참 허전할 듯하다.
직장에서의 '나없으면안돼병'이 육아에 까지 이어지는 게 썩 좋은 것은 아닌 것 같다. 요즘 내 체력과 면역력은 떨어질 때로 떨어져 바닥상태이고 엄마가 이 지경이다 보니 아이들도 나에게 심하게 의존하는 것 같다. 나 없으면 엉망일 거라 예상했던 내 교실이 나 없어도 원만하게 잘 돌아간 것처럼 내 품 안이 아니더라도 아이들은 내 생각보다도 훨씬 더 잘 해낼 것이다. 믿고 맡겨보자. 믿고 기다려보자. 아이가 내 품에서 벗어나는 걸 걱정하고 두려워하지 말자. '잘 자라고 있구나'하고 기뻐하고 안심하자. 아이들은 내 생각보다 강인하고 씩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