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적인 일에도 예의가 있는데 하물며 비일상적인 일에는 오죽하랴
밥 먹는 데도 예의가 있다. 가능하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하고, 나도 즐거운 방법으로 먹어야 할 것이다. 식당에서 가끔 시끄러운 광경을 만날 때가 있다. 불쾌하다. 혼자만 살고 있는 것 같고, 그 기분을, 그 생각을 강요하는 것 같아서 그렇다. 더러워서 피한다고 애써 자위하기도 하고, 우리 국민성이 원래 그렇다며 애꿎은 다른 사람을 끌어들인다. 도대체 국민성이란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지 확실하진 않지만. 그런데 내가 가진 즐길 권리만큼 저 사람도 권리가 있다. 그건 명확하다. 어느 정도까지 소란한 것이 그 사람의 권리와 나의 권리 간의 균형일까? 사람이 많아질수록 그 균형점은 찾기가 더 복잡해질 것이다. 식당에서 떠드는 일이 이리 복잡한데 더 차원 높은 다른 일은 오죽 복잡할까.
방해를 받는 식사가 이렇게 성가신 일일진대 보다 덜 일상적인 일들을 방해받으면 더욱 성가시고 짜증이 난다. 책을 만나는 것은 인연이라는 말을 믿는 나는 우연히 발견하게 된 책은 없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읽히겠지 하는 마음에 붙박이가 된 책도 있지만 언젠가 읽을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책을 버리는 것이 싫어서 주인 없는 책을 보관하는 일을 할까 싶을 때도 있다. 우연히 시작했지만 읽고 나서 보니 유명한 작가가 쓴 훌륭한 작품이었다는 것을 알고 희열을 느낀다.
나와 같은 사람에게 노벨상 수상작가 한강의 작품이 여러 매체에 소개되는 것은 재앙이다. 2024년도에 노벨상을 받을 줄 알았다면 2016년도 맨부커 상을 받았을 때 읽어야 했다. 읽기에 게을렀던 나의 뒤늦은 후회다.
노벨상 수상작가인 한강의 작품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해하기 어려웠으면 노벨상을 못 받았겠지. 세계인들이 공통으로 느낄만한 정서가 그의 작품에 담겨 있으니 번역도 되고 상도 받지 않았을까? 그의 작품을 '역사의 교훈과 상처를 심미적으로 표현했다, 인간의 폭력과 아름다움을 뒤섞어 끌어안는다'라고 찬양하는 사람이 있다. 심지어 '시적인 언어로 벼려진 감수성으로 인간의 비극을 주시하고 고통과 혐오를 드러내는 인물을 조명'하고 있는데 이를 '통치술에 대한 감각적 불복종'이라고 한다. 그는 작품을 통해 '타자의 고통에 감각적으로 반응하면서 시대적 폭력과 전체주의에 저항'한다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사르트르와 니체를 인용하면서 모든 것이 우연이므로 무상하며, 예술이 삶과 세계를 정당화시킨다고 한다. 심지어 미학적 재현이란 의미의 '미메시스(Mimesis)'의 개념을 새로이 구현했다며 철학의 반열에 올려놓기도 한다.
한강의 작품이 이렇게 어려운 것이었는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무서워서 읽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삶은 누구에게나 주인공이 될 자격을 부여한다. 자연과학에 절대법칙이 있다고 믿었던 신념은 양자역학으로 우연성이 지배하는 세계관으로 변경되고 있는 세상이다.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것, 실제가 어떤지 몰랐던 것을 알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문학의 한 역할일 것이다. 타자를 외면하는 사람도 있고, 적극 공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삶이 내게 부여하는 의미도 상황에 따라 달라질진대, 수많은 개인은 얼마나 많은 삶의 의미를 맞닥뜨릴 것인가? 그런 삶의 양태를 작가만의 스타일로 풀어내어 공감대를 끌어내는 게 문학이고 예술이 아닐까? 그래서 그걸 받아들이는 방식도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한강의 작품보다 한강의 작품을 평해 놓은 것이 더 어렵다면 이상하다. 논어보다 논어집주가 더 두껍다. 한강의 작품이 논어는 아닐 것이다. 어렵게 만들지 말자. 국수 먹는데 뼈해장국이 더 맛있다고 호들갑 떠는 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