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유예하면...
‘기쁨과 보람을 느끼는 일을 하기 위해서 그렇지 않은 일을 하며 견딘다. 그것 때문에 지금 하는 일이 기쁨과 보람을 주지 못할지언정 소홀히 하지 못한다.’ 아주 좋아했던 말이다. 그래서 그렇게 살았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슬프다. 돌아보면 내 인생은 자체가 나중의 행복을 전제로 지금의 행복을 유예한 어음이었다. 보장도 확신도 없이 미래는 더 나을 것이란 믿음을 갖고 살았다. 현재의 기쁨을 미래로 잠시 밀어 두고 젊음을 온통 밀어 넣었다. 일과 기쁨과 보람이 겹치면 제일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는 말은 사치라 여기기도 했다. 더한 것은 수십 년 동안 이 명제에 단 한 번도 제대로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이런. 나는 왜 당시에 기쁨과 보람을 느끼며 살지 못했을까?
기쁨과 보람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감정은 내 안에서 일어난다. 감정을 일으키는 원인은 밖에 있을지라도 그걸로 인해 내 내부가 영향을 받으려면 외부의 자극이 내면에 영향을 줄 만한 가치가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자극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내 나름대로 해석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자극이 내 내면을 움직일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해석하면 감정이 생길터이나 그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아무리 큰 일이라고 해도 길에 놓인 여느 돌덩이와 매한가지다. 내 안에 원래 있는 자극에 의미를 부여하는 메커니즘이 어떤 자극인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런 메커니즘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조건반사적으로 작동한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일 것이다.
외부의 자극은 사건이다. 사건은 피할 수 없다. 숨겨 둘 수도 없고 무시할 수도 없이 해결해야 하는 숙명을 지닌 것이 사건이다. 사건은 선택할 수도 없다. 그러나 수사기관에서 입건하지 않으면 사건이 되지 않는 것처럼 내게 일어난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의 메커니즘은 내가 선택할 수 있다.
기쁨과 보람의 대상은 내 밖에 있다. 내 밖의 사건을 내 것 화(化) 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면 나의 기쁨과 보람의 발화가 불가능하다. 주파수가 맞지 않거나 전압이 맞지 않거나 발화점이 맞지 않으면 자동차는 시동이 걸리지 않고 불은 붙지 않는다. 하물며 남의 해석을 받아들이는 경우는 말해 무엇하랴. 세모 구멍에 네모 블록을 넣으려는 시도가 된다. 내면의 만족을 외부의 사물에서 얻으려는 인지적 착오 때문에 기쁨과 보람은 먼 나라의 일이 되는 것이다.
기쁨과 보람은 행복의 표현이자 증거다. 이를 유예하면 유예한 만큼 의미 없는 시간으로 전락한 인생이 늘어난다. “넌 늙어 봤냐? 난 젊어 봤다!”라고 외치는 어느 개그맨의 말이 예사롭지 않다. 꽉 찬 인생을 산 사람이면 늙어도 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