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을 구웠다

썬텐의 방식

by 문맹

신혼여행 때니까 십수 년 전 일이다. 여름휴가=피서라는 공식으로 평생 살아온 나에게 독일 남편과의 첫여름휴가는 여러모로 서로를 발견하게 되는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대부분의 한독부부와 달리 나는 남편이 한국으로 주재원으로 발령되어 만난 케이스라 독일 문화에 대해 쥐뿔도 모른 채 사기결혼(?)을 당했다. 독일문화에 대해 좀 알고 결혼했으면 문제가 적었으려나? 아니지 싶다. 문화 차이는 나라 차이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기에…


태국으로 신혼여행을 갔던 우리는 썬베드에 눕기 전에 왕창 선크림을 발랐다. 그때까지 해는 무조건 피해야 하는 것이라 알았던 나는 선크림을 바르는 둥 마는 둥 하고 그늘안쪽 깊숙이 누워 계속 책을 읽었고 나와 전날 결혼한 독일 아저씨는 한국에서 내가 사준 선크림을 신나게 바르고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지글지글 썬텐을 즐기고 하루종일 아이처럼 풍덩거리며 바다 수영을 마치고 저녁게 호텔로 들어가면서 난리가 시작되었다. 내가 한국서 사 가져간 선크림은 워터프루프가 아니었던 것이다. 물속과 물밖을 신나게 왔다 갔다 하던 신랑의 피부는 그날 저녁부터 핑크색에서 벌건색으로 바뀌며 머릿속까지 껍질이 다 벗겨지기 시작했다. 그늘 속에서 하루종일 놀았던 나는 멀쩡했고 그날부터 신랑은 휴가 끝나는 날까지 벌겋게 벌겋게 벗겨졌다.

여름휴가 때마다 우린 이 이야기를 한다. 애들이 크고 나니 애들한테까지 나의 만행을 전한다. 그것도 매년 매 여름휴가마다… 엄마가 신혼여행에서 아빠를 구워삶았다고…


그 후 십수 년 여름휴가를 유럽에서 보내며 알게 되었다. 살성 약한 양인들이 어떻게 피부보호를 하고 물속에 뛰어들고 수영을 해야 하는 건지. 남편은

심지어 알람을 켜 놓고 앞판을 10분 굽고 뒤판을 10분 굽고 양쪽 사이드도 10분씩 굽는다!


알일이 있었겠는가… 훌륭한 동양인의 DNA를 가지고 태어나 햇볕에 피부 트러블도 적고 심지어 어릴 때 여름휴가에 가서 좀 타고 껍질 벗겨내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살았던 나인데… 여름휴가에 까져서 죽은 피부를 떼어내는 것은 휴가를 마무리하고 가을로 접어드는 시즌스 그리팅(season’s greeting) 같은 행사였다.

신혼여행부터 확 구워 버려서 그런가 수십 년째 아주 말을 잘 듣는다. 인종도 성별도 세대도 문화도 언어도 나와는 그 어떤 공통점도 없는 남편이 인생에서 나와

한 방향을 바라보며 협조하며 잘 살고 있는 것은 신혼여행부터 제대로 본때를 보인 K 여인의 터프함일지라.

이번 휴가에도 작열하는 태양에 몸을 맡기기 전에 매번 꼼꼼하게 선크림을 바르는 남편을 옆에서 지켜보며 답답한 마음에 숨이 넘어간다. 심지어 아빠의 살성을 똑 닮은 둘째 딸까지 이젠 스테레오로 몸에 크림질

크림질. 내 살성을 가진 아들내미와 물속에 풍덩 먼저 뛰어들어 훅 달아올라간 혈압을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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