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가 너무 좋아 어쩔 줄 몰라하는 남편

그걸 바라보는 노동현장 한가운데서의 나

by 문맹

남편은 작정하고 조기 은퇴를 수년 전에 하고 프리랜스 컨설턴트로 나섰다. 프리랜서로 나서고 나서 코로나 기간에도 일감이 끊이지 않고 지금까지 세차게 잘 싸워 나가더니 올 초에 프로젝트가 끊기고 집에 들어앉았다. 한두 달 노는 건 당연하다 생각했다. 아니 석 달까지 노는 것도 그동안 쉼 없이 달려온 남편에게 응당히 필요한 휴식의 시간이라 생각했다. 대학에서 쥐꼬리만큼 버는 내가 살림을 책임질 수 있다면 사실 놀게 해 주고 싶었다. 쿨하게~~~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우리는 사실 이런 시간이 올 것을 각오 하도 있었다. 신혼 초부터 직장에서 탄탄하게 자리 잘 잡고 있던 남편덕에 숟가락만 가지고 독일로 와서 부족함 없이 애만 키우며 잘 살았다. 물론 둘째가 두 살 반 되던 해에 사업도 시작하고 바로 박시과정에 들어가면서 어찌 저찌 나도 경제전선에 뛰어들어 돈을 벌긴 했으나 용돈벌이 정도로 살림에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 돈벌이라기보다는 내가 독일에서 장차 일어나 경제활동을 하게 될 밑천을 마련하고 있었다고나 할까. 그때는 장차 대학에서 이렇게 가늘게 벌게만 될 줄 몰랐었다.


올초부터 놀기 시작한 남편은 괜찮은 오퍼가 와도 자신의 자존심과 가격을 꿋꿋이 지켜가며 깎으려는

상대 회사를 능멸하며 당당하게 집에서 놀기

시작했다. 참고로 그는 전형적인 독일 엔지니어다. 이 “독일”과 “엔지니어”라는 두 개의 단어가 붙으면 어떻게 되는지 같이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하기 힘들다. 앞으로 최선을 다해 살벌하게 고발할 것이다.

남편은 뭐든지 완벽하게 하거나 아니면 제대로 엉망으로 하거나 딱 두 가지밖에 없다. 중간은 없다. 자의 반 타의 반, 집에 들어앉아서 말 그대로 실업기간을 제대로 즐겼다. 버는 경제에서 쓰는 경제로 화끈하게 돌아서면서…


은퇴 남편 집안일 적응(?) 단계

1단계: 먼저 소심하게 집안 양념통 모두 교체- 투명 유리병으로. 원하는 희귀 양념 모두를 재래시장에서 다 구입해서 부엌 찬장을 유리병으로 리노베이션 했다. 그리고 양념통별로 직접 레이블링을 했다.


2단계: 쿠킹기기 교체- 망가지거나 앞으로 (순수한 본인의 판단으로) 망가질 것으로 생각되는 부엌의 크고 작은 쿠킹기기들 고치거나 신종으로 구입한다 (이에

앞서 미친 듯이 검색해서 품질조사 및 가격 조사를 꼼꼼히 한다).


3단계: 인덕션 교체 및 프라이팬 모두 교체- 수억을 들여 (내 눈엔 그렇다) 자유 인덕션 (?)으로 바꾸고 꾸덕꾸덕하고 표면이 다 망가진 프라이팬을 모두 바꿨다.


이즈음에서 나는 불안이 엄습했다. 석 달 넉 달 놀면서 저리 신나게 구매활동을 하다니… 일해야 하지 않겠냐 넌지시 말하면 좋은 오퍼가 오면 마지막으로 알고 인생역전 프로젝트로 만들겠다는 말만 계속한다. 그동안 집에 벌아다 준 돈을 생각하면 신랑을 구박할 수는 없지만 얄팍한 나의 벌이를 생각하면 아무리 그동안 황금알을 낳아주었다 한들 불안하기 그지없다. (남편에 따르면 나는 그냥 학위를 가진 보모란다- 틀린 말은 아니다. 난 내 학생들이 너무 예쁘고 사랑스럽다. 일에도 무식하게 올인한다).


4단계: 아이스크림 머신 구입- 동네사람 다 불러서 시식시킨다. 이뿐 아니라 가지가지로 맛있는 음식을

해주니 입이 즐겁고 부엌일 최고로 싫어하는 내겐

쾌재이긴 하지만 저렇게 신나게 놀 일인가…

아이스크림 머신

오늘 학교 다녀오니 세 가지 종류의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놓았다. 망고, 코코넛, 멜론. 멜론맛은 한국에서 먹던 “메로나” 가 생각나 눈물이 나올 뻔했다. 그런데 이 눈물의 정체가 향수와 범벅된 메로나 맛 때문인지 6개월째 땡전 한 푼 안 벌어오면서 신나게 잘 노는 울집 아저씨 때문지 구분이 안 갔다.


노는 남편이 너무 잘 노니 일하는 부인은 무섭다. 평생 이렇게 살게 될 것 같다. 염려하던 일이 (대비하던 일이) 사실이 되었다. 남편이 해주는 편한 밥 먹고도 불안해서 살이 안 찌는 것은 고맙다.


뜨아, 앞으로의 나의 운명에 대해 천연 연료를 사용해 두 시간 동안 머신에 돌려지고 하루 동안 냉장고에서 숙성시킨 세 가지 맛의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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