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나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챙겼던 복리후생 항목 중에 하나가 건강검진이었다. 매년 가을 즈음에 받았는데, 나올 무렵이 2월이라 몇 달 되지 않아 또 받았다. 그냥 내 돈으로 나중에 받을 수도 있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공짜(정확히는 회사에서 대신 내주는 것이지만)일때 해두자는 것이었다. 당장 그만두면 내 수입이 어찌 될지 예상이 불확실하여, 신용카드도 다시 점검하였다. 있는 카드를 정리하는 게 아니라, 발급 자체가 어렵기 때문에 직장인일 때 준비해 두자는 것이었다. 이미 마음은 광야를 향하는 기분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경제적 기반으로 대부분 선호하는 튼튼한 "대기업 직장인"으로 20년을 지냈다. 오랫동안 그 생활이 몸에 배어있던 터라, 직장이라는 둥지를 벗어났을 때 어떤 점이 달라질까를 예상해 보는 게 생각보다 어려웠다. 가장 큰 걱정인 수입 부분은 몇 번이고 시뮬레이션을 해보기도 했다. 이제부터 모든 게 나 혼자 해결이었다. 자유에 대한 대가는 결코 만만치 않다. 나름대로 수년간 준비하고 고민해온 나도 두려움이 있는데, 남아 있는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나보다도 더 막연한 두려움, 충분히 공감이 가는 얘기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의 길을 떠난다는 메일을 사내 인트라넷에 올리자마자, 정말 많은 답장을 받았다. 대부분 축하와 격려의 인사말이었는데, 공통적으로 시작하는 말은 "부럽다"였다. 정말 회사에서 큰 뜻을 펼쳐보겠다는 몇 분을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나를 따라서 같이 떠날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을 것이다. 나를 쥐어짜기는 하지만, 세상에 대한 파도로부터 나를 지켜주기도 하는 곳. 그곳이 직장이라는 울타리였다. 하루하루를 정말 견뎌내기 힘든 퍽퍽한 곳이면서도, 결코 떠나기 쉽지 않은 둥지라서다.
독립 이후에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내 명함을 만드는 것이었다. 회사원에게 명함은 나의 존재 이유나 다름없다. 그 얇은 종이 한 장이면, 제삼자에게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제일 확실한 방법이다. 그런데, 회사를 나오는 순간, 분명히 나의 역량과 기술은 크게 차이가 없음에도 그 명함은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한다. 내가 직장인이었을 때, 외부업체와 미팅을 할 때 내미는 명함은 사실 내 명함이 아니다. 그 명함에 쓰여 있는 세 글자 이름은 어느 누구로도 바뀔 수 있다. 마주 앉은 업체 입장에서는 누구로 바뀌든 큰 상관이 없다. 물론, 개인 친분이나 성격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반드시 나여야 할 이유는 없다.
나오기 전날까지도 차 한잔 하자는 분들이 정말 많았다. 이 분들도 언제까지 회사를 다닐 수 있을지 불안해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임금피크제가 도입되었으나, 정년까지 채울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당장 '직장인'을 대신할 대안은 찾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의 일이 너무 바쁘기 때문이란다.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했다. 하지만, 내가 내린 해석은 "지금의 수입을 유지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자신이 직장을 벗어나 돈을 벌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도 의문을 가졌다.
시중의 자기계발서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조언이 "급한 일보다는 중요한 일을 하라"는 얘기다. 회사 업무에 주로 적용되는 얘기지만, 내 삶에 있어서도 똑같다. 지금 당장 급한 회사일 때문에, 나의 미래와 같은 중요한 일은 순서가 밀린다. 오히려, 그런 것은 쓸데없는 고민이라 치부하고 더 열심히 회사일에 매달리는 경우도 있다. 우리 모두는 이미 성장한 어른이지만, 직장이라는 둥지를 떠나지 못한 어린 새와 같다. 언젠가 떠나야 할 곳임을 알고 있지만, 나 자신이 날 수 있을까 두려움에 머물러 있다. 구조조정과 같은 태풍이 갑자기 몰아쳐 둥지 밖으로 내몰려 날 수도 있지만, 내가 먼저 힘차게 날아볼 준비를 해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