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나와 4~50대 퇴직자들 대상 강의를 들을 기회가 많았다. 자주 언급된 인간의 기대수명은 우리의 나이 기준으로 이미 100세를 당연한 듯 예상했다. 내가 살아온 만큼의 시간을 앞으로 보내야 한다는 얘기다. 회사를 다닐 때에도 가끔씩 상상해 보던 나이지만, 실제로 재테크와 이직 등을 고려하자면 현실적인 수치였다. 수십 년 전에는 정년 은퇴를 하면 자녀는 결혼 전후의 나이가 되어 독립하고, 부부는 그때까지의 저축이나 부동산을 처분해서 남은 여생을 특별한 일 없이 소일거리로 마무리하는 게 기본이었다. 반면 이제는 내가 무슨 일을 하건, 100세까지 살아갈 계획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고, 우리나라에서도 90년대 후반 IMF 이후로 사라진 단어가 "평생직장"이라는 말이다. 실제로 나이 먹어 죽을 때까지 다니는 직장이라는 의미는 아니고, 정년까지 다닐 수 있는 직장이란 의미였다. 위에 얘기했던 대로 정년까지 다녔으면 평생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정년의 개념이 없다. 조기 퇴직이나 명예퇴직 등의 용어가 대신 등장했다. 끝자리에 위치한 "직"이라는 글자는 바로 직장을 의미한다. 일하는 곳이 없어졌을 뿐, 나의 역량이나 기술이 퇴직하는 그 순간에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많은 직장인들이 두려움을 갖는다.
두려움의 원인을 찾자면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가 일하던 직장에서만 인정받는 기술일 수도 있고, 이제는 세상이 필요로 하지 않는 기술일 수도 있다. 올해 상반기를 뜨겁게 달구었던 이슈 중의 하나였던 이세돌 기사와 알파고의 바둑대결. 여기서 나온 유머 아닌 유머가 "알파고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해야 앞으로 살아남는다는 것이었다. 이세돌은 인간다운 바둑으로 오히려 인기를 얻었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능력을 갖는 것은 모든 직장인의 꿈이다. 오늘도 많은 직장인들이 어학을 비롯하여 자기계발에 그나마 없는 시간을 또 쪼개어 투자하고 있다. 그럼 내 인생의 목표는 결국 이 정글의 서바이벌 게임에서 살아남기 위한 것이란 말인가? 서글프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여기까지 읽으면 순순히 받아들이는 분과 말도 안 된다는 분으로 나뉠 것 같다. 오히려 나에게 대드는 분은 희망이 있다. 단순히 살아남는 것을 넘어선 목표가 있다는 분이다. 만약 누구보다도 훌륭한 능력을 갖추었다면, 그래도 계속 이 직장에 머무를 것인가? 누구나 멋진 능력을 원하지만, 그 바람의 시각에 따라 큰 차이가 난다. 살아남는 게 목표라면 도태된다는 두려움을 피할 수 없다. 결국 살아남는데 필요한 기술과 업무에 올인한다. 반면 넓고 멀리 보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만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분야를 탐구한다. 그럴 여유가 있느냐 물을 수도 있겠지만, 여유는 주어지는 게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오랜 시간 한 우물을 파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다. 흔히 얘기하는 1만 시간의 법칙도 여기에 해당한다. 그 일에 익숙해지면, 쉽게 다른 분야로 눈길을 돌리기 쉽지 않다. 새로운 것을 접하는 데에 노력도 많이 들고, 풋내기로 시작하자니 자존심이 허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계속 남과 차별화된 한 우물을 더 깊이 파 들어간다. 지금의 직장이 그 깊이를 인정해 주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 하나. 그 깊이를 직장 밖 사회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인가? 인정받기 힘들다면 나는 지금 서바이벌 게임에서 헤어나지 못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직장조차 조만간 등을 돌릴 확률이 높다.
실제 내 몸 값은 순수한 기술력의 값어치만으로 산정된 게 아니다. 조직 문화에 대한 이해라던가, 외부에서 배울 수 없는 사업 비밀과 관련된 것도 많다. 하지만, 사업 영역이 바뀌거나 조직 운영 방침이 바뀐다면 그 장벽은 언제고 무너질 수 있다. 바깥 사회에서도 나를 필요로 하는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 밤새워 일하는 충성이 필요하다면 밖에서 더 열심히 일할 사람을 데려올 수도 있다. 열정은 직장이 아닌 나에게 쏟아부어야 한다. 지금이라도 내가 하는 일이 경쟁력을 갖춘 일인지 확인해 봐야 한다. 자신 있는 평생직업을 가지고 세상에 팔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두려움을 벗어나는 길이다. 그 방법을 앞으로 함께 찾아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