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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현 Mar 29. 2021

걷는 사람들이 만드는 풍경

서울 청계산 물길

다른 사람과 함께 산길을 걸을 땐 배려가 필요하다. 걷는 속도를 맞춰야 하고, 지나친 대화를 하면서 평온한 분위기를 해치면 안된다. 같이 걷는 이가 힘들어하지는 않는지, 이 풍경에 함께 공감하고는 있는지 등에 대해 생각해야 하고. 자연을 평화로운 풍경으로 느끼기 위해선 서로에 대한 배려가 필수다. 


인터넷에서 걷기 동호회 하나를 발견했다. 나보다 20세는 더 많아 보이는 회원들이 있는 동호회였다. 대부분 직장에서 은퇴하고, 종종 서울 근교를 걸으면서 건강과 친목을 챙기는 동호회. 음주 금지, 하산 후 모임 금지. 인터넷 카페 분위기도 점잖았고 모든 산행이 체계적으로 진행되는 듯 보였다. 만나서 깔끔하게 걷기만 하고 헤어진다는 그 동호회를 한 달 넘게 살펴보다가, 여름날의 청계산 등산 코스에 나도 참석하기로 했다.


청계산은 서울을 둘러싼 산 중에 가장 남쪽에 있는 산이다.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맑아 '청계(淸溪)'라는 이름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 서울 서초구와 성남, 과천과 의왕에 접해있어 다양한 지역에서 오를 수 있다. 풍경 좋고 걷기에도 좋은 산이라 평일 주말 가리지 않고 많은 등산객의 사랑을 받고 있는 청계산. 이날은 '청계'에 집중하여 다같이 청계산의 물길을 따라 걷기로 했다. 


서울 4호선 대공원역에서 만난 8명의 회원들. 아이디로 신원을 확인했다. 휴대폰이나 공인인증서로 본인 확인을 하는 시대에 닉네임으로 내 존재를 확인시켜 줄 수 있다니 새삼 간편하고 좋았다. 간단히 목례로 인사를 대신하고 다들 걷기 시작했다. 회원들이 2미터 간격으로 일렬로 걸었다. 맨 앞에 선 주최자는 뒤따라오는 회원들을 보면서 속도를 조절하며 걸었다. 


여름의 청계산은 싱그러웠다. 눈앞의 수목부터 저 멀리 보이는 숲까지 하나같이 같은 눈부신 녹색을 띄고 있었다. 오로지 빛 만이 명암과 채도를 결정했다. 바람에 따라 빛이 움직이면서 숲에 입체감과 생명력을 불어 넣었다. 우리가 걷는 길옆으로 흐르는 개울이랄까, 자그마한 폭포랄까 작은 물줄기가 흘렀다. 물소리도 바람을 타고 우리 곁을 솨아악 시원하게 지나갔다.     

 

혹시 물놀이 하실 분 계신가요.

걷는 내내 아무말도 하지 않던 주최자가 하산 중에 놀라운 질문을 던졌다. 물놀이 하잔 말을 그렇게 점잖게 조곤조곤 할 수 있다니. 어떤 남자 회원이 모자를 슥 벗었다. 모자 아래론 하얗게 샌 은빛 머리칼과 매끈한 민머리가 반짝 빛났다. 신과 양말을 벗더니 무릎까지 발을 담갔다. 어이, 시원하다. 그러자 다른 사람 몇몇도 그 물에 발을 퐁당 담가본다. 시원하네. 나는 손만 슬쩍 담가봤다. 여름 햇빛을 반짝반짝 반사하는 그 물에 담긴 내 손. 보석을 가득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 본 사람들과 함께 개울에 손과 발을 담그고 가만히 앉아있으니 낯설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사진 찍는 사람 하나 없이 다들 고요히 개울에 마음을 퐁당, 빠뜨리고 있었다. 혼잣말인듯 전하는 말인듯 조용히 목소리가 오갔다. 날씨가 좋네, 물이 시원하네, 청계산 예쁘네. 적극적으로 대화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가끔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나뭇잎같은 그 목소리들에 다들 공감하고 있었다. 


하산 길에 몇몇 회원이 무릎 통증을 호소해 빨리 내려가는 팀과 천천히 내려가는 팀으로 나누어 내려오게 됐다. 빨리 내려간 팀은 청계산 입구역 근처 산행 종착지에서 천천히 내려온 팀을 기다렸다. 날씨가 좋단 식의 얘기를 서로 30분 동안 나누었다.

  

다같이 즐겁게 걷기 위해 모였고 무사히 잘 걷고 나서 다들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날 산행에선 푸른녹음과 시원한 웅덩이도 좋았지만 함께 발을 맞춰 조심스레 산길에 올랐던 사람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 닉네임이나 얼굴은 이제 기억나지 않지만 서로 간격을 맞추고, 행여나 실수하지 않도록 질문하나도 서로 조심스러워했던 사람들. 나보다 빠른 사람을 먼저 보내고, 늦는 사람을 기다리는 여유를 가진 사람들. 푸른 나무 아래 알록달록한 등산복을 입고, 흩날리는 꽃처럼 함께 걷던 그날의 풍경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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