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놈가시의 변신
회색빛 솜구름이 낮게 드리운 흐린 날,
눈이 오려나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눈이 와도, 비가 와도 좋겠다는 마음으로 뒷산을 올랐다.
여름 내 무성한 풀들 사이로 뱀이 나올까 겁이 나고,
더위에 지쳐 한동안 등산을 멈췄던 터라
한 겨울이 오기 전 마지막으로 산과 인사를 나누고 싶었다.
뒷산은 낮지만, 급한 오르막이 있어
한 시간이면 오를 수 있는 거리임에도
땀을 내기엔 충분한 코스다.
산은 여름과는 또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지난봄 가지치기를 하고,
길을 만들며 정성 들였던 산책길은
낙엽에 덮이고, 꺾인 나뭇가지들로 지워져 있었다.
어떤 나무는 뿌리째 뽑혀 쓰러져 있고,
어떤 나무는 부러진 채 다른 가지에 기대어 있다.
생성과 소멸이 뒤엉킨 흔적들이 길 위에 흩어져 있었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가며 길을 다시 만들고,
조심조심 올라갔다.
산돼지가 파놓은 흔적이 자주 눈에 띄었고,
놀란 고라니가 휙 달아났다.
나는 일부러 노래를 부르며 내 존재를 알렸다.
정상에 도착했을 때,
지난 겨울 내내 꿋꿋이 버텨낸 나무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말없이 견디는 생명에게,
자연스럽게 마음속에서 감사가 터져 나왔다.
늘 그렇듯 오르는 동안은 숨이 차고 힘들지만,
내려오는 길은 성취감으로 가득하다.
겨울산은 쉽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찬바람, 얼어붙은 길,
그 속에 감춰진 이야기들을 조용히 봉인한 채
비밀의 문을 닫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문을 열고,
그 속의 속삭임을 듣고,
내려오는 길에는 마치 봉인된 사건을 풀고 온 탐험가처럼
뿌듯한 마음이 차올랐다.
집에 도착해 바짓가랑이를 보니
도둑놈가시가 수없이 붙어 있었다.
바싹 마른 가시들이
바람에도 떨어지지 않고
여러 갈래 손으로 내 옷자락을 붙잡고 있었다.
너희는 어쩌자고 여기까지 따라왔니.
민들레 홀씨처럼 멀리 날아가고 싶었니?
지리산에 씨앗을 떨구고 싶어 까치 소문을 들었니?
그 집요한 매달림이 귀찮기는커녕,
왠지 모를 뭉클함을 안겨주었다.
그 여름, 도둑놈가시 너도
노란 꽃을 피우고
벌과 나비를 불러들였지.
하지만 계절이 바뀌고
바람이 불고, 서리가 내려오자
이곳이 더는 네가 머물 곳이 아니라는 걸 알았을 거야.
그래서 결심했지.
떠나겠다고.
새로운 곳에 뿌리내리겠다고.
그리고 그 순간, 내가 나타났고
너는 매달렸고
나는 너를 데려왔다.
그래, 도둑놈가시야.
무임승차비는 받지 않을게.
여기서 네 꿈을 펼쳐봐.
새로운 자리에,
다시 네 노란 꽃을 피워봐.
오늘 내가 겨울산을 오른 건
너를 데려오려고 간 게 아니었을까 싶다.
산을 오르며 내가 만난 건
그저 풍경만이 아니었다.
도둑놈가시에 붙어 따라온 작은 씨앗처럼,
나 역시 어디론가 나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나의 독백은 어느새
작은 가시 하나를
꿈을 향해 움직이는
작고 단단한 씨앗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우리의 삶도 결국은
붙잡고, 매달리고, 흔들리면서
어디론가 뿌리내릴 자리를
끊임없이 찾아가는 여정이라는 것을.
겨울산은 그렇게
내게 또 하나의 희망을 안겨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