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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만의 설날을 만들어가며

힘들고 성가셨지만 또 익숙한 그때가 그립다

by 운아당

용감한 형님이다. 작년에 설, 추석 명절 제사를 없애버렸다. 조짐은 몇 년 전부터 있었다. 둘째 형님이 요즘 사람들은 명절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며, 어느 대학 교수가 명절 제사는 원래 유교에도 없는 것이라 말했다며, 이제 형제들도 다 나이가 많아 자녀들이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었으니 각자의 집에서 명절을 지내자고 말해 왔었다.

우리 시댁 집안 오 형제 남자들은 처음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큰소리로 반대를 하더니, 어느 때부터인가 못 들은 척 마이동풍이더니, 결국은 작년 추석 때 동의를 하고 돌아가신 어른들에게도 고했다. 나조차도 처음에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형님은 수백 년 전부터 인생 규칙처럼 새겨진 것을 없애자고 주장할 수 있을까. 나는 엄두도 내지 못할 말이었다.

하지만 사회적 규범이라는 것이 다른 사람 하는 것을 모방하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주변에 여러 사람들로부터 명절에는 차례를 지내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을 보니 그런 쪽으로 가도 크게 잘못된 것이라 생각하지 않나 보다.

우리 여자들도 힘든 음식 장만과 오고 가는 것이 버겁게 느껴지기 시작했기에, 나를 포함한 다른 동서들이 이구동성으로 주장하고 나서니 남자들도 수그러들며 명절 제사를 하지 않기로 했다.

올해 작은 설날, 전통 시장에 나갔다. 여느 때 같으면 붐벼서 지나다니기조차 힘들었을 시장이 갈수록 썰렁해져 가는 걸 느꼈다. 손이 많이 가는 전 종류는 딸이 미리 명절음식 전문점에 주문을 해두었다고 한다. 탕국, 나물, 생선, 과일, 불고기 만들 재료를 사서 집으로 왔다. 차례를 지내지 않는 시장 보기는 쉽고 간단했다. 우리 먹을 것만 사니 양도 적고 종류도 단출했다.

결혼한 딸 가족이 있어, 사위랑 손자 손녀를 위한 설음식이라고 장만을 하지 우리 부부만 있으면 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다. 설날 아침, 우리 부부는 떡국을 끓여 먹었다. 점심때가 되니 딸 가족들이 왔다. 아이들 세배를 받고 나자 남편은 점심 먹고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에 성묘하러 가자고 했다. 남편이 제일 무료한 듯 보였다.

예년에는 설이 다가오면 보름 전부터 시장을 보기 시작한다. 제사 음식을 준비하려면 종이에 적어가도 빠진 것이 많아 몇 번을 마트나 시장에 왔다 갔다 한다.

남편은 제사를 정성으로 지내는 것을 효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대청소를 하고, 제문을 쓰고, 가족들에게 연락을 하며 바쁘게 움직였다. 제사 음식 준비에 꼭 필요한 배달기사이자 잔심부름꾼이었다.

그런데 제사가 없는 올 설날은 요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다가 직장에서 해고당한 사람처럼 허탈한 모습이다. 나는 북적거리지 않으니 조용하고 편하고, 우리 가족끼리 함께 하는 시간이 있어 좋았다. 그런데 이건 뭐지? 한편으로 아주버님, 형님, 조카들과 떠들썩하던 분위기가 살짝 그립기도 하다.

나 어릴 적 설날은 가슴 설레며 기다렸다. 또래 친구들은 설빔을 입고 동네 어른들께 인사하러 다녔다. 어른들은 덕담과 함께 잔돈을 주시곤 했다. 외지에서 온 언니 오빠들도 온 동네를 돌며 인사를 했다. 노래자랑도 하고, 윷놀이도 하고, 거의 대보름까지 잔치 분위기였다. 나는 새로운 일기장을 사서 계획을 적고, 보름달을 보며 두 손 모아 소원을 빌었다. 설날은 마음을 다잡는, 일 년을 여는 문턱 같은 날이었다.

올해 설날, ‘티맵’에서 가장 많이 설정된 목적지가 인천국제공항 1 터미널이었다고 한다. 설이라는 말보다 ‘연휴’라는 단어가 더 크게 느껴지는 시대가 되었다. TV에서도 한복 입고 윷놀이하던 설 특집 프로그램을 보기 어려웠다. 거리에서도 세배하러 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편리함이라는 이름 아래 많은 전통이 사라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설날의 의미마저 희미해지는 것 같아 살짝 서운하다.

하지만 사라진 자리에 반드시 공허함만 남는 것은 아니다.

무언가가 사라질 때, 우리는 무엇을 새로 만들어 넣을지를 고민할 수 있다.
편리함 속에서도, 따뜻함을 잃지 않는 새로운 문화.
형식보다 마음을 전하는 의식.
남겨진 여백 위에 우리 가족만의 설날을 다시 그려보고 싶다.
내년 설에는, 우리만의 방식으로 사람 냄새나는 하루를 만들어보려 한다.
사람답게, 그리고 더 따뜻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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