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로 주고 선물로 받았다
딸이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 수학여행을 제주도로 간다고 했다. 상기된 얼굴로 친구들과 함께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며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딸은, 난생처음 하늘을 나는 상상에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나는 문득, 지금도 가정 형편 때문에 수학여행을 가지 못하는 아이가 있을까 싶어 물었다.
뜻밖에도, 그런 아이가 한 명 있다는 것이었다.
“엄마, 경아는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할머니랑 살아요. 급식비도 못 낼 때가 많대요.”
나는 잠시 말없이 딸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 친구 수학여행 경비, 엄마가 낼게. 선생님께 전해드려. 그리고 꼭, 누가 냈는지는 비밀로 해달라고 말씀드려.”
형편이 많이 어렵다고 하여 용돈까지 조금 더 보태 넉넉히 보냈다. 어쩌면, 그 아이가 여행을 더 걱정 없이 즐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중학교 2학년이던 어느 봄, 수학여행은 속리산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엄마에게 꺼내지 못했다.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던 엄마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기에, 수학여행 얘기를 꺼내는 것조차 사치처럼 느껴졌다.
여행을 떠나는 친구들의 버스를 보며 몇 명 남은 아이들과 하동 송림에 소풍을 갔다. 섬진강과 소나무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우리 사이에는 묵직한 침묵만이 흘렀다.
수학여행을 가지 못했던 기억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친구들의 이야기는 거의 한 학기 동안 이어졌고, 밤새 노래하고 춤췄다는 이야기 중간에 멈칫한 친구의 침묵이 더 아프게 다가왔다. 수학여행은 단순한 행사가 아니라, 마음의 거리를 좁히고 추억을 쌓는 연결의 장이라는 걸 그때 알게 되었다. 그래서 경아라는 아이가 그런 추억 속에 함께 있기를 바랐다. 소외되지 않기를, 친구들 사이에 한 발짝 안으로 들어갈 수 있기를.
며칠 후, 딸이 선생님께 받은 것이라며 내민 작은 봉투 안에는 하트 모양의 열쇠고리 하나와 손편지가 들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경아예요. 수학여행을 못 갈 뻔했는데, 고마운 분의 도움으로 다녀올 수 있었어요. 제게는 선물 같았어요. 저도 커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감사합니다.”
편지 속 ‘선물’이라는 단어가 가슴 깊숙이 스며들었다. 내가 다녀온 것도 아닌데, 마치 내가 수학여행의 추억 속에 함께 있었던 것처럼 뿌듯하고 따뜻한 기운이 밀려왔다.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마음이 연결되어 같은 주파수를 맞출 때, 그것이 진짜 선물이구나.
그때 처음, '선물'이란 단어의 진짜 의미를 마음으로 알게 되었다.
나는 종종 오헨리의 단편 「크리스마스 선물」을 떠올린다. 서로를 사랑하지만 가난한 부부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서로를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을 내놓는다. 아내는 긴 머리카락을 팔아 남편의 시계줄을 사고, 남편은 시계를 팔아 아내의 머리빗을 산다. 그들이 준비한 선물은 쓸 수 없게 되었지만, 그것이야말로 가장 완전한 선물이었다. 서로를 향한 마음, 계산 없는 나눔, 사랑의 결정체.
하지만 지금 우리가 주고받는 것들 중에는 ‘선물’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엔 망설여지는 것들이 많다. 대가를 바라는 주고받음, 뭔가를 얻기 위한 포장된 뇌물, 마음을 돌리려는 미안함의 증표. 이런 것들은 마음과 마음을 잇기보다 거리를 더 벌려 놓는다. 선물은 이름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마음이 담기지 않으면, 그것은 그저 물건일 뿐이다.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보았던 장면이 기억난다. 아빠가 아이를 때린 다음 날, 아이가 평소 갖고 싶어 하던 장난감을 사다 주며 “선물이야.”라고 말한다. 아이는 조용히 그것을 받고, 방에 들어가 장난감을 침대 위에 내던진다. 그건 선물이 아니었다. 선물이라는 단어로 감정을 덮으려는 시도였을 뿐이다.
진짜 선물은 마음의 중심에 ‘그 사람’이 있다.
무엇을 받으려는 마음도, 기억되기를 바라는 기대도 없다.
그저 주고 싶어서, 그 사람이 기쁘길 바라는 마음 하나로 내어놓는 것이다.
그러니 자랑할 것도 없다. 계산할 필요도 없다.
진짜 선물은 마치 공기처럼, 물처럼, 햇살처럼 조용히 존재한다.
나는 이제야 안다.
내가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지나,
이제는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을 품게 되었다는 사실이
누군가에게는,
그리고 내게는
가장 귀한 선물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