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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odrain Sep 27. 2016

어느 추운 날의 겨울 1

겨울 하나, 겨울 둘

겨울 하나


서른셋이 되던 1월 아주 추운 날.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2년 동안 연애에 관심을 둘 여유조차 없었고 학교와 집만을 오가는 생활을 겨우 끝마친 그 어느 날, 그가 내게 말을 걸었다. 저 멀리에서 지켜보며 왔다고.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아주 잠시 이야기를 나눠도 되겠냐고. 


고마웠다. 여전히 나에게도 이런 기회가 남아있구나. 아직도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구나. 괜찮구나. 여자로서의 자존감이 회복되는 소리가 들렸다. 심지어 그는 나보다 두 살 연상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싱글 오빠의 존재가 희귀해질 때 나타난 귀인이었다. 


그는 참 귀여웠다. 

아까부터 봤는데 용기가 안 나서 담배 한 대 피우고 용기를 냈노라고. 유독 추웠던 날씨와 유독 얇은 옷을 입었던 내게 벗어준 그의 무스탕은 참 따듯했고 호기롭게 옷을 벗어주고는 얇은 옷으로 콧물을 흘리며 괜찮다고, 하나도 안 춥다고 강한 척하는 그가 나는 참 귀여웠다. 술을 못 마시는 것도 귀여웠다. 샹그리아 한잔 마시고 얼굴이 빨개져 취한다던 그가 귀여웠다. 높은 힐에 얼음길을 걷다 넘어진 내게 팔짱을 끼라고 하고는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다고 떨리며 말하는 그가 정말 귀여웠다. 


나는 그와 손잡는 것을 참 좋아했다. 손만 잡고 있을 뿐인데 온 몸이 녹는 것 같은 두근거림이 있었다. 손을 잡고 멍하니 강가를 바라보고 있던 순간에도 그랬다. 그가 나를 보는 눈빛은 어떤 욕망보다는 순수한 열망에 가까웠다. 그래서 난 그의 손을 잡고 그의 눈을 보는 게 좋았다. 


눈이 펑펑 오던 날 투명한 우산 하나로 눈을 잔뜩 맞으며 떡볶이를 먹으러 가던 순간에도 내가 눈을 맞을까 자신의 반쪽이 온통 젖은 그의 상냥함도 좋았다. 가만히 안아주며 머리에 입을 맞추는 상냥함도 좋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던 날, 아주 늦은 새벽 장례식장에 찾아와 상복만 입은 채 배웅하는 내게 춥다며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자신의 외투를 벗어주고 달려가는 그가나는 참 좋았다. 


그래서 다음 데이트 때 돌려주려 차에 가지고 다니던 그의 외투를 택배로 보내던 날 마음이 많이 아팠다. 




겨울 둘


그날은 나에게도 그에게도 힘든 날이었다. 

그의 하루는 눈을 뜨는 순간부터 꼬여있었고 집에 돌아오는 순간 화가 폭발할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지금에서야 그의 상황을 이해하고 좀 너그러웠다면 하고 생각하지만, 그때의 나 역시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그에게 기대고 싶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례 내내 할머니와 엄마의 슬픔을 돌보다가 장례가 끝나고 일주일 후 할아버지의 부재가 너무 크게 다가왔다. 할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에게 전화를 했다. 지금 잠깐 만나면 안 되겠냐며. 울고 있는 목소리를 듣고 그가 아무 말 없이 나와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자신의 스트레스에 허덕이고 있었고 나를 돌아볼 틈이 없었다. 


그렇게 나 혼자 그에 대한 서운 함이 쌓여있던 때에, 역시나 힘든 하루를 보내고 쉬고 싶던 그는 다음날 일찍 보고 싶단 내게 화를 냈다. 이 정도도 이해해주지 못하냐며. 나는 단지 그가 내 상실을 보듬어주길 바랬을 뿐이었다. 조용히 전화를 끊었다. 화를 내지도, 따지지도, 서운하다며 울지도 않았다.

 

그때의 나는 화를 낸다거나따진다거나운다거나하는 그런 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알아버렸던 것일까, 그런 것들로 해결하려는 방식을 포기해 버린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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