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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당마녀 Oct 07. 2022

나무가 된 우리 아버지

버스는 이번에는 제법 긴 시간을 달려 아버지 고향이 아닌 내가 마음대로 정한 아버지 마지막 쉼터에 도착했다. 아버지 영정사진과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아버지 유골함을 모시고 수목장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아버지를 모실 자리를 보러 산에 올라갔다. 이 자리라는 것도 부동산 같은 것이라 입구에 가까운 자리, 평지에 있는 자리, 소위 말하는 뷰가 좋은 자리에 따라 가격 차이가 난다. 그리고 어차피 같은 나무인데도 거기에 구멍을 하나 더 파 부부 목으로 하는 경우도 가격은 배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원하는 가격대에 맞는 자리를 찾아 그렇게 한참을 올라가 후보 자리를 보여주었다. 하나는 뒷공간이 널찍한 자리와 한 칸 더 올라가 저 끝에 강이 보이는 자리였는데 저 끝에 살짝 보이는 강줄기 때문에 가격 차이는 200만 원 정도 났다. 다시 결정의 시간이 왔다. 과연 아버지가 저 강을 보고 좋아하실까 싶기도 하고 우리 식구들이 다 모여 절을 올리려면 그래도 널찍한 곳이 좋을 것 같기도 하고 가격에 크게 무리 없는 첫 번째 장소가 내심 마음에 들었지만 부부 목을 신청하였기에 나중에 실제로 이용하실 어머니의 의사가 더 중요했다. 어머니는 죽고 나서 무슨 소용이냐면서 결정을 못 하셨고 시간만 흐르기 시작했다. 수목장 직원은 아버지 모실 공간도 마련하기 위해서는 구덩이를 파야 하는 시간도 필요하고 조금 있으면 해가 진다며 재촉하기 시작했다. 이왕이면 경치 좋은데 하라는 성화에 못 이겨 결국 저 끝에 강줄기가 살짝 보이는 비싼 곳으로 아버지를 모시기로 하였다.

다시 식구들이 모여 절을 하고 아버지 유골함을 구덩이 넣었다. 수목장이란 것이 사방이 꽉 막힌 납골당과 다를 것이 없어 보여서 걱정이 되었다.

‘아버지가 저 유골함을 잘 나와서 저 풍경을 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잠시 스쳐 지나갔다.

또다시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시간이 다가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지금까지 몇 번의 마지막 인사를 했었는데 살아생전 성격이 급하셔서 했던 말을 몇 번이나 말하냐면서 성화를 내셨던 아버지가 생각나서 이번에는 마지막 인사를 하지 않았다. 여동생과 어머니는 아직도 할 말이 많은 지 한참이나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물론 아직도 남아있는 눈물과 함께 말이다.


함께 올라갔다 이번에는 아버지를 혼자 산에 두고 내려왔다. 아버지의 가족분들이 없어 외로워하실지, 밤에 어두워서 무섭지 않으실지 걱정이 되어도 이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남아있는 아버지 형제, 동생 그리고 나의 가족들 앞에 서며 마이크를 손에 쥐고 몸을 숙여 감사의 마음 전했다.

“ 3일 동안 슬픔을 같이 해줘서 버틸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우리 아버지 잘 모시고 돌아갑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아침에 떠났던 버스는 저녁에 되어서야 다시 장례식장으로 돌아왔다. 그제야 상복을 벗고 무거웠던 상주 완장을 벗을 수 있었다. 다른 친척분들도 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고 우리 삼 남매는 아무 말 없이 이제는 어머니의 집으로 모였다. 집으로 들어가기 전 매부들은 살짝 나를 불러 정산이나 머 다른 부족한 지출이 없었는지 조심히 물어왔고 다행히 잘 마무리되었다고 고맙다고 답을 했다. 매부들은 같은 식구끼리 그렇게 고마워할 필요 없다며 나이 어린 처남을 다독거리며 집으로 들어갔다. 긴장도 풀리고 그동안 쌓였던 피로 탓에 입맛도 없었지만 조카들과 나의 딸은 벌써 배고프다고 아우성치는 탓에 대충 배달 음식을 시켜 먹고 시간을 보냈다. 

각자 가정과 사정이 있었지만 오늘은 어머니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 몰래 우리끼리 순번을 정해 며칠 동안만이라도 이 집에 머물기로 했다. 오늘은 동생네에게 어머니를 부탁하고 길었던 여정을 끝내고 내 집으로 돌아왔다. 피곤해서인지 생각보다 깊은 잠에 금방 빠져들었다. 다음날 조의금 봉투와 계좌이체된 통장을 정리하면서 지인들에게 감사 인사를 돌리고 또 누구의 조문객인지 애매모호한 봉투, 이름이 없는 봉투, 동명이인의 계좌번호 같은 것들을 어머니와 매부들에게 물어물어 주인을 찾아주고 하다 보니 금방 하루가 지나갔다. 그런데 뒤늦게 삼촌에게 들었던 내용이지만 나의 직장동료, 지인들에게만 인사하고 아버지 친척들에게는 아버지 부고 문자만 아버지 이름으로 보내고 내 이름으로 감사의 인사를 몇몇 빠뜨려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상주의 된 사람이 가져야 하는 예의라는 기준에서 감점 처리되었다고 했다.

또 골치 아픈 일은 유산 문제였다. 당연히 어머니가 계시니 어머니에게 당연히 가고 욕심을 부려서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 보험금이며, 집이며 하는 것들을 어머니에게 상속되기 위해서는 자녀들, 자녀들의 배우자, 손자들까지 상속에 동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금이나 금융재산 같은 것들은 다 같이 모여 서류에 도장을 찍고 처리가 금방 되었지만 부동산이면 서류도 복잡하고 그걸 처리하는 절차도 복잡하여 도저히 경조사 특별휴가 내 처리가 어려울 듯해서 법무사에 돈을 주고 처리하기로 하였다. 아버지 살아생전에 당신 몸이 많이 약해지신 걸 알고 타고 다니시던 차는 둘째 매부에게 팔았던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보통은 사십구재라는 것이 여느 영화처럼 7일마다 좋은 곳으로 가라고 제를 지내고 7개의 지옥도를 무사히 빠져나오길 기도하는 의미로 지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절에 돈을 주고 맡기고 사십구재 때 가족들이 참석하는 경우가 흔하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가까운 곳에 모셨으니 매주 다 같이 모여 아버지를 보러 갔다. 아버지를 보러 갈 때마다 아버지가 건강했던 모습의 사진과 아버지가 보고 싶어 할 손주들 사진들을 나뭇가지에 매달고 언제가 말라비틀어져 버릴 생화보다는 언제나 생기가 가득한 조화이지만 아버지가 생전에 좋아하셨던 화려한 색깔들로 아버지 마당을 꾸며드렸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아버지 만나러 가는 한 시간 남짓 차창 밖 풍경이 이제야 겨우 보이기 시작할 무렵 어머니에게 연설하듯 과장되게 말하기도 하고 어쩌면 나에게 스스로 독백처럼 둘러대면서 말했다.

“ 여기 오기 잘했다. 이렇게 아부지 자주 보고 얼마나 다행이고.”

나의 마음속 깊은 우물에 있는 불안감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소리쳤지만 허망한 메아리처럼 어머니는 침묵으로 대답하셨고 나는 원했던 대답을 듣지 못해 또다시 혼잣말로 몇 번을 속으로 삭이다 화장터에서 나에게 날카롭게 쏘아붙였던 어머니의 말이 또 생각나 버려 나도 다시 침묵했다. 그런 답답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고 또다시 불안감이 나를 사로잡을 때

아버지에게 묘비명을 작성해달라는 수목장 직원 연락받았다. 아버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며칠을 혼자 고민하다 아버지에게 끝내 하지 못했던 말들을 전하기로 했다.     


이제 자유로운 바람이 되어

즐거운 여행 하시다 가끔씩

우리에게 바람으로 다가와 

말해줘요 잘 지내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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