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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솔 Feb 28. 2018

" 청춘의 파편 "

나는 청춘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이었다.

푸른 봄에서 떨어져 나온 나는 한 가닥의 나뭇잎이었나

지겹도록 울어대는 푸른 봄의 청춘, 나는 그 청춘의 언저리. 어쩌면 나의 모든 생과 삶이 청춘의 파편이 아닐까. 청춘이 모태라고 우겨대지만 결국 겉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작은 파편이 결국 내가 아닐까. 나는 이 청춘의 파편으로써, 파편이 되어서.


작은 불빛 하나가 세상에 떨어지던 날, 무수히 많은 파편들이 세상 아래로 꽂히던 날에 그 속에서 나는 피었다. 핀 채로 그 속에 품에 파고들었으면 모를까, 나는 허겁지겁 나의 모태에게서 벗어나 정처 없이 뛰었다. 품을 벗어난 냉골 같은 곳은 나를 죄어오고 사정없이 괴롭혔다. 그제야 나는 나의 어리석음에 한탄했다. 돌아갈 곳은 없었다. 걸을수록 낭떠러지에 가까워짐을 알면서도 끝없이 걸었다. 마치 그 낭떠러지가 양쪽에서 나를 기다리듯, 어느 방향을 향해도 나를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결국, 내 생의 청춘을 이 낭떠러지로 떨어뜨리고 내 청춘을 바쳤다고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일삼았다.


저 멀리 파편들이 빛나는 순간들이 보였다. 푸른색의 영롱한 빛들의 각자의 색을 내며 제각기 어울리는 춤을 추던 때 상처받은 내 청춘은 절규했다. 그들과 대조될 만큼 붉은색 피를 토해내며 넘어지고 좌절했다. 그들은 제각기 시기에 맞게, 상황에 맞게, 운에 맞게 빛났으며 나와 같은 조각들은 세상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이 깊은 낭떠러지 안에 나만 남겨져있는 기분을 도통 벗어날 수가 없었다. 주위는 어둡고 나의 빛은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다. 저 멀린 초록색 들판도, 색깔 있는 풍경도 나와는 반대였다. 나는 칙칙하고 어두운 색의 모습만을 품고 살아갔다.


내가 혹은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상처받았고 스스로 사랑하지 못했다. 자존감은 나와 거리가 멀었고 모든 것들이 나와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나 스스로를 혐오했다가 위로하고, 할퀴다가 약을 바르고 수없이 그 짓을 반복했다. 상처는 짓물러 곯아 터지기 시작했고, 굳은살이 배기도 전에 새살을 잘라내고 쓰라린 고통을 안았다. 이 모든 것들이 나의 조각이라고 항변했고, 사람들은 나를 잘 이해해주지 않았다. 예전 그때처럼 버려지는 것이 두려웠으면서 스스로 무리에서 나오려 들었다. 심지어 같은 상처를 가진 이들도 이해해주지 못했고, 누군가를 보듬아 줄 여력 따위도 없었다. 나는 간절히 한 명의 손길만을 기다리며 천천히 구석으로 파고들었다.


나의 색은 무엇이지. 밝은 색은 태초에 나와 어울리지 않았고, 검은색도 지금 나의 인생과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단정히 느껴졌다. 흰색은 우스웠고, 형광색의 색깔들은 부담스러웠다. 그때쯤에 나는 아마, 회색이었다. 아주 연한 회색. 보일 겨를도 없음에도 스스로를 내세우지도 못하는 연한 회색. 그렇게 어딘가 무리에 맞춰 한두 번씩 끼어있다가도 사라지면 아무도 모르는 그런 색. 기억해주지 못할, 이해해주지 못할, 어중간한 딱 그 위치의 색감.


날카롭고 뾰족했던 이전과 다르게 무뎌졌다. 무뎌진 끝은 누군가에게 함부로 상처 줄 수 없는 조각들이 되었고,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순간에 무른 조각으로 끝까지 함께하지 못했다. 꽂힐 수 없기에 열심히 살지 않았고 나태했다. 물러 터졌다는 말, 그 말에 나는 할 말없이 황당한 채로 울었다.


나를 사랑해주는 이가 있었던가, 생각을 짚고 하나하나 꺼내온다. 그 수많은 이들 중에서 진심이었던 사람들이 스쳐 지나간다. 이런 모습이라도 아껴주던 사람이 언젠가 있었던가 하고 되감아서 곱씹는다. 나는 그 사람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흔적만 남기고 간 누군가를 곱씹으며 앓는다. 내 작은 파편마저 가져가 버린 그 사람에게 내 영혼까지 내어준 기분이 든다. 인기척조차 없는 사람이 함부로 마음을 뒤집어 놓고 떠났다가를 반복한다. 그럼에도 보고 싶었기에, 더욱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때아닌 밤에 내 침대를 들어 흔들어 뒤집어 놓는 당신이 있었다. 예전 그때처럼 상처받았던 나를 이해해주진 못해도 온전한 마음으로 나를 받아주려 했던 당신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어미 잃은 새끼 고양이처럼 추위에 벌벌 떨었었다. 손길 한 번에, 당신이 주던 먹이 한 끼에 경계심이 무너지고 세상을 내주었다. 나의 영역은 온갖 당신이 되었고, 나는 당신만을 집착하며 도통 불안해했다. 그 짧은 시간 안에 모든 것을 주었던 나는 당신을 잃었고, 다시는 그 손길을 느끼지 못함에 다시 스스로를 내팽개친다. 나는 이전처럼 다시 한번 비를 맞지만, 누군가의 손길에 함부로 길들여지지 않으려 꼬리를 내세운다. 꿈속 당신을 휘저으며, 그 시간을 추억하며.


사랑하는 일이 쉬운가. 이전에 내가 쉽다고 했던가, 혹여 그랬다면 지금의 나는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다. 사랑한다는 일은 갈수록 어렵다. 마음을 주는 일은 무서워졌고, 양을 재어 얼마나 내어줘야 하는지를 계산한다. 처음 본 사람들을 판별하고, 옳고 그름의 잣대를 댄다. 거절하고 받는 일은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는 게 아니다. 그것들은 과정의 연속일 뿐 결코 경험 따위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전에는 분명 마음만이 전부였던 것 같은데 이제 오니 그게 아니라니 우스운 변명 같다. 실패하고 실패하며 깨달아가는 건, 다시 사랑할 수 있다는 용기 따위가 아니라 얼마나 못났는지를 따지는 한심한 모습과 다시 이전처럼 태울 수 없다는 초췌함뿐이다. 적어도 지금의 나는 그렇다고 자기 합리화하고 싶다. 덜 상처받기 위해서, 덜 아프기 위해서, 내가 사랑했던 누군가를 최대한 덜 미워하기 위해서, 혹은 더 미워하기 위해서.


상처는 상처를 낳고, 이 과정이 반복되면 상처받은 일에 대해 납득하기 시작한다. 이전에는 지레 겁을 먹었던 것들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순순히 순응하게 된다. 이 일들은 결코 긍정적이지 않고, 극복시켜주지 않는다. 조용히 상처 안에 상처를 덧발라 스스로를 험하게 망가뜨린다. 스스로에게 해가 되지만 적어도 이어지는 다음 상처에 대해서는 갈수록 무신경하게 된다. 이해하게 되고, 호들갑 떨며 엄살 부리지 않게 된다. 무성한 가시덤불 속에서 온몸을 뒤 튼다면 더 많은 상처를 남길 뿐 결코 벗어날 수는 없다. 나는 그저 이 가시 많은 덤불에서 발길만을 내디딜 뿐 쉬이 몸서리치지 않는다. 몸서리칠 때마다 수놓았던 상처들이 채 낫지도 않았지만, 나는 결코 걸음을 멈추진 않는다. 끝없는 가시덤불이지만 때가 되면 끝날 거라는 막연한 희망만을 품은 채.


맞다. 이런 나라도 사랑했다. 애정을 갈구하고, 사랑해달라고 몸서리치고, 한겨울에 추위도 모른 나무들처럼 꼿꼿이 자리에서 버텨 그 흔적을 채우려 했다. 때론 무리를 해서라도 정반대로 변화의 길로 내디뎠지만 상황을 결코 녹록지 않았다. 그럼에도 억지로라도 나를 게워내어, 나를 바꾸려 들었지만, 맞지도 않는 이치에 집어넣을수록 내 삶은 불행해지는 것 같았다. 아니, 불행해졌다. 결국 이 길을 선택하게 된 지금. 더 나은 방안이 있을까 하고 고민할수록 나 자신은 괴롭다.


다음은 없다. 이것이 청춘에 대한 합당하고 유일한 정의이다. / 온 밤을 뒤져 단 하나의 감정을 찾아보지만, / 나는 언제나 그럴듯하게 실패할 뿐. / 부정을 위한 부정, 생애를 위한 생애 가치와 기준 따윈 없다. 그러니 가르치려 들지 말라. / 천년의 바위가 되느니, 찬란한 먼지가 되겠다. - 유희경 <청춘>


나는 아직 피우지 못한 봄. 내 생의 꽃을 모두 틔우는 날, 억만 겹의 사랑을 담은 누군가 나를 함부로 꺾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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