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0 한국 떠나기 전
Bg. 비 - 폴킴
스물둘 겨울. 나는 6개월의 배낭여행을 앞두고 있어. 인도, 유럽, 아프리카로 말이야. 아르바이트를 세 개 정도 하면서 여행 자금을 모으고 있었지. 내가 여행을 준비하면서, 그리고 여행을 떠난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물었어.
여행을 왜 가고자 하는 거야?
여행의 목적이 뭐야?
"그냥. 뭐."
라고 괜히 뭔가 더 있는 듯 의미심장한 듯 말했지만 사실 나도 잘 모르겠는 거야. 수십 번씩 생각이 왔다 갔다 했거든. 차가운 바람이 아닌 하루 종일 놀기 좋은 따뜻한 곳으로. 거대를 넘어선 광활한 자연을 마주하기. 따뜻한 눈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그런 풍경 속에 있는 나. 그런 거 누구나 다 좋아하잖아. 그냥 나도 남들 다 좋아하는 그런 뻔한 이유 때문이었겠지? 그래서 대답은 늘 "그냥. 뭐" 였던 거 같아
오늘은 그동안 혼자 꽁꽁 싸매왔던 얘기를 친구에게 꺼냈지. 우리는 원래 나는 인도, 너는 중국을 따로 여행한 후 3월 즈음 유럽에서 만나기로 했어. 그 뒤엔 이집트, 아프리카까지 같이 여행하자고 말했지만 나는 오늘 너에게 갑자기 혼자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했어.
나는 혼자서 여행하고 싶었어.
너와의 여행이 싫은 게 아니라, 홀로 하는 여행이 막연한 큰 로망이었다고 말했지. 나중에 네가 그리워질 것 같지만.. 누군가와 정해진 약속으로 자유로운 여행에 제약이 있다는 게 아쉽다고. 그런 변명과 핑계를 네가 오해할까 봐 주저리주저리 설명했지.
그렇게 말하다가 알게 됐어.
그래 난 여행이 아니라 방랑이 하고 싶었어.
인도의 쏟아지는 별 아래에서 낙타 사파리, 이집트 다합 에메랄드 빛 바다에서 스킨스쿠버, 독일에서 낮술 마시기, 에펠탑 야경 보며 노래 듣기, 그런 구체적인 여행 낭만들이 있지만 사실 어디서 뭘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나는 그냥 좀.. 떠돌고 싶었던 거야.
나에게만 집중해서 까만 밤 쏟아지는 별을 담아내는 나를, 내리쬐는 오후의 그늘을 즐기는 나를, 그런 나들을 너무 만나고 싶었던 거야. 어느 지극히 평범한 골목길을 뚜벅뚜벅 걸어도 그게 여행이 아니라 방랑이고 싶었어. 그래서 이 긴 낭만 여행을 조금 두렵고 쓸쓸하더라도, 혼자 마주하고 싶었던 거 같아.
출발이 약 열흘 남은 이 시점에서. 여행을 떠나는 날 유치하지만 출발. 하고 딱 선 긋고 새롭게 시작해서 새로운 나를 만나고 싶어. 이런 사람도 하고, 저런 사람도 해보고 싶어. 몰랐던 내 모습도 보고 싶고, 이미 잘 알고 있는 내 모습도 다시금 확인해보고 싶어. 낮에는 용감해지기도 하고, 밤에는 겁쟁이가 되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씩씩거리기도 하고, 헤헤거리도 하고. 몰래 찔끔찔끔 울기도 하고, 속으로 큭큭 거리며 웃기도 하고 혼자서 그렇게 다- 해보고 싶어.
그리고 여행 다 끝나고 나면 나 스스로 토닥토닥하면서 잘했다. 멋있었다. 수고했어. 그러고 싶어! 그냥 그게 다야. 내 여행은 화려하지도 부럽진 않을지 몰라도 그 누구보다 나를 향한, 나를 알아가는 방랑이고 싶어.
너는 지금 이 여행을 통해서 옆으로 넓어지고 있는 거야. 많은 경험을 하고, 새로운 것을 보고, 그리고 혼자서 시간을 보내니까. 너무 걱정 마. 여기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너보다 높아졌다면, 넌 그들보다 더 넓어지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