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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가 띄우는 편지 - 무중력

by 고래뱃속
무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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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오랜만이야

나는 네가 오래전에 데려와

어느 날 서랍 한구석에 놓아 두곤

까맣게 잊어버린 작은 몸뚱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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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 몰래

네 작은 방 안의 세상이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있었지

방문을 꼭 걸어 닫으면 아무도 듣지 못하는 네

비밀스러운 웃음소리,

아무도 듣지 못하게 네

숨죽여 가며 우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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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네가 웃을 때면,

울 때면


언제나 조금쯤은

중력이 사라지던 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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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언젠가부터

하루,

또 이틀

내 몸 위로,

내 작은 몸뚱아리 옆으로

차곡차곡


네가 알던,

차차

네가 모르게 된

크고 작은 또 다른 몸뚱아리들이 쌓여 가는 동안


네 날개 같았던 입꼬리 끝과

눈꺼풀 끝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무거워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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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이제 더 이상

울지도,

웃지도 않고

네 얼굴 주름 사이사이 짙어진 무게는 어느새

우리의 작은 서랍 속으로 범람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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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람하여 흘러넘친 나는

아주 오랫동안 닿은 적 없는 너에게 닿아,


네 처진 입꼬리와

나지막히 바닥을 향한 눈꺼풀 끝에

잊혀져 차가운 몸을 가져다 댄 채

살며시 속삭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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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그만 놓아 줘도 돼, 나를

놓아 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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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별안간 중력이 사라진 우주처럼

동그랗게 커다래지는 너의 두 눈이

그래,

하고 말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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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 안의 잊혀진 몸뚱아리들은

아주 오래 기다린 것처럼

투명한 날개가 되고

이제 우리는 이곳을 떠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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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는 보았어

뒤돌아보면서

이제 다시는 돌아보지 못할 뒤를 보면서


네 처진 눈꺼풀과,

무거워진 입꼬리가

되찾은 무중력을


웃는구나,

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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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시




글: Editor LP





비움| 곽영권 글·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그림|2009년 2월 23일|14,500원

채우기보다는 비우고 나누면, 더 행복할 수 있는 아름다운 주문
대부분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위해 미래를 먼저 준비하고 현재를 희생하며 살고 있는 듯하다.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언제나 시간이 부족한 것은 아닌지… 이렇게 오늘을 놓치고 사는 우리에게 <비움>은 나눌수록 행복해진다는 단순하면서도 소중한 진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 현실은 끝없이 경쟁하고, 이기려고 기를 쓰고, 나누기보다는 가지려고만 하지요. 채우기보다는 비우고, 혼자보다 나누면 더 행복할 수 있다는 아름다운 생각을 아이들에게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 작가 백스토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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