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울증에 걸린 공무원입니다 21
저는 본래 잡다한 분야에 관심이 많고 취미 또한 다양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한창 우울증에 빠져 있을 때는 그 모든 취미 생활이 모두 거추장스럽게만 느껴지더군요. 그래서 거의 한 달이 넘도록 컴퓨터를 켜지 않았고, 책을 펴지 않았으며, TV도 보지 않았습니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다만 한 가지, 지금 4년째 하고 있는 모바일 게임만은 계속 했습니다. 물론 게임을 플레이한다기보다는 켜 놓고 화면을 들여다보면서 멍하게 있는다는 쪽에 더 가깝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만 해도 제게는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 게임은 내가 아주 완벽하게 고장나지는 않았다는 약간의 희망과, 무언가 해야 할 것이 있기에 내일도 살아야 한다는 자그마한 목표 의식을 주었습니다. 너무 거창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우울증에 걸려 온통 잿빛이었던 저의 삶에서 오직 그 모바일 게임 하나만이 희미하게나마 색채를 띄고 있었습니다.
이후 꾸준히 약을 먹으면서 약간 상태가 호전되자 저는 수십 권에 달하는 만화책을 전자책으로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정신없이 읽었습니다. 대부분은 쉽게 낄낄대며 웃을 수 있는 부류의 만화였고, 내용이 심각하거나 우울한 것들은 의식적으로 피했습니다. 스마트폰의 작은 화면으로 만화책을 들여다보는 그 시간만은 저의 우울함과 괴로움을 조금이나마 잊을 수 있었습니다.
우울해하는 사람에게는 취미생활을 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취미생활을 통해 마음을 환기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울증이 심하게 걸린 상태에서는 평소 좋아했던 취미마저도 거추장스럽기만 합니다. 취미에 들여야 할 노력, 예컨대 책을 펴서 글자를 읽는다거나 TV를 켜서 채널을 돌리는 아주 작은 노력마저도 큰 산을 넘는 것처럼 힘들고 어렵게 느껴집니다. 심지어는 눈으로 글자를 읽고 있는데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도 잦습니다.
더군다나 우울증에 걸렸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사람들이 대체로 격려 섞인 조언을 해 주려고 합니다. 하지만 매우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조언해주려는 사람들 대부분은 우울증에 걸려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조언이 대동소이합니다. 운동을 해라. 사람들과 자주 만나라. 마음을 편하게 먹어라. 기타 등등.
기본적으로 선의에서 나온 말임을 알기에 고개를 끄덕이긴 합니다. 하지만 우울증에 걸린 상황에서 그런 것들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상당히 힘들고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원래 성향이 활동적이지 않다면 더욱더 그렇지요. 평생 운동이라고는 해본 적 없는 사람이 갑작스럽게 조기축구회에 가입해서 사람들과 왁자지껄 떠들며 운동할 수 있을까요? 마음을 편하게 먹지 못한 바람에 우울증까지 걸린 사람이 그렇게 쉽게 마음을 바꿀 수 있을까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우울증에 걸린 누군가가 혹시라도 제게 조언을 구한다면, 저는 1)꾸준히 약을 먹고 2)상담을 다니는 동시에 3)원래 가지고 있던 취미나 새로운 취미에 손을 대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가능한 한 시간과 노력이 덜 들어가는 취미일수록 좋습니다. 굳이 다른 사람과 함께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게 있어서 모바일 게임이나 만화책 보기가 그랬던 것처럼, 원래 좋아했고 손쉽게 할 수 있으면서 언제라도 중단했다가 다시 재개할 수 있는 그런 취미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간혹 무익하게 시간을 보내는 걸 싫어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취미란 '아무 이득도 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행위입니다. 아무런 이득도 없기에 의무감도 책임감도 느낄 필요가 없죠. 그 점이 핵심 아닐까요?
특정한 목적 의식을 가지고 하는 취미는 이미 취미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걸 자기계발이라고 부릅니다. 건강해지기 위한 운동. 현명해지기 위한 독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공부. 전부 그런 부류들이지요. 우울증에 걸린 사람에게 이런 것들은 오히려 나쁠 수 있습니다. 그딴 건 모두 집어치우고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그 어떤 목적의식도 없이 기분 좋게 시간을 낭비하는 행위. 그게 우울증에 좋은 취미라고 저는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