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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Jun 02. 2023

우울증의 사소한 증세들에 대해

나는 우울증에 걸린 공무원입니다 23

지난 번 글에서(https://brunch.co.kr/@gorgom/172) 제가 겪은 우울증의 증상들에 대해 적어본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그에 비해 훨씬 사소하고 눈에 안 띄는, 별 것 아니지만 뭔가 묘한 증세들을 적어볼까 합니다.




일단 우울증에 걸린 후로 눈물이 많이 늘었습니다. 이건 감정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체적인 문제입니다.


보통 슬플 때 눈물을 흘립니다. 간혹 감동했을 때나 기쁠 때 흘리기도 합니다. 아무튼 그런 정신적인 작용에 의해 나오는 것이 눈물이죠. 그런데 저는 우울증에 걸린 이후로 종종 아무런 감정 없이 눈물을 흘리곤 합니다. 예컨대 가만히 앉아서 딴생각을 하는 중에, 심지어 커피나 만화 따위를 떠올리는 도중에 저절로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 거죠. 남들이 보면 아마도 깜짝 놀랄 겁니다. 제 증상을 아는 사람이라면 크게 걱정할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정말로 아무런 감정 없이 그냥 눈물이 나는 겁니다. 저도 참 곤란하게 말입니다. 


하품을 할 때도 자연스럽게 눈물이 나오지요? 심지어 그럴 때 나오는 눈물의 양도 늘었습니다. 이제는 하품을 한 번 할 때마다 마치 슬픈 드라마라도 본 것처럼 눈물이 한 줄기 주르륵 하고 흘러내립니다. 


웃어넘길 수도 있겠지만, 아무 생각 없이 눈물을 흘리는 제가 가끔씩은 무섭습니다. 뭔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울한 증세에 빠져 있고, 그런 마음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작용해서, 그래서 눈물이 나오는 게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한창 상태가 심각했을 때 저는 때때로 나라는 사람이 분리된 것처럼 느끼곤 했습니다. 우울감에 빠져서 괴로워하고 있는 내가 있고, 현실에서 한 발 벗어나 그런 나를 가만히 관찰하고만 있는 또다른 내가 존재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아무런 감정 변화도 없이 눈물이 날 때마다 그런 또다른 내가 우울함에 빠져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더러 상상도 해 보곤 합니다. 




그리고 희한하게도 샤워 시간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저는 상태가 매우 안 좋았을 때는 샤워 자체를 하지 못했습니다. 샤워기에 목을 매다는 자신의 모습이 끊임없이 생각나서 너무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지속적으로 약을 먹었기에 그런 상태에서는 벗어났는데, 그 반대급부인지 샤워 시간이 엄청 늘어났습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종종 그러는 것처럼 위생에 대한 강박관념이 생긴 건 아닙니다. 샤워기 물줄기를 맞으면서 그저 멍하게 있는 것도 아닙니다. 평소대로 면도를 하고, 샴푸로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고, 몸을 씻습니다. 다만 그 과정 하나하나가 어쩐지 예전보다 더 오래 걸리는 것 같습니다.  


그렇잖아도 아내는 종종 저더러 남자가 샤워시간이 너무 긴 것 아니냐고 투덜대곤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더 시간이 늘어나버렸으니, 당장은 아니더라도 나중에는 좀 곤란해질 것도 같습니다. 출근해야 하는데 느긋하게 샤워로 시간을 보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자려고 누웠을 때, 옆에서 자고 있는 아내의 숨소리가 무척 신경이 쓰여서 쉽게 잠들지 못합니다. 저는 원래 머리만 대면 즉각 곯아떨어지는 걸로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든 어디에서든, 그 어떤 상황에서든 쉽게 잠들었죠. 그러나 우울증에 걸린 이후로는 아내의 숨소리가 자꾸만 인식되어서 잠에 빠지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그렇다고 아예 잠을 못 자는 건 아닙니다. 그럴 때 거실로 나가서 소파에 누우면 거의 즉각적으로 잠이 들거든요. 제가 자기 전에 꼬박꼬박 먹는 약에는 적지 않은 항불안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항불안제는 원래 잠이 오는 성분이라 수면제로도 쓰인다고 하니, 과학적으로 따지자면 이렇게 빨리 잠드는 게 정상입니다. 그런데도 왜 아내의 숨소리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인지 당최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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