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 메고 24일간 걸어 국토 1000km를 종횡단한 58살 청년 이야기
21일 차 2017. 6. 30 강원도 횡성군 정금초등학교–황고개–청태산고개–강원도 평창군 장평리 (38.7km)
아침 6시. 학교 운동장은 이미 훤히 밝아 있었다. 밤새 운동장을 뛰어놀던 아이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산골초등학교는 야영지로서는 최적이었다. 자연과 순수를 맘껏 누렸던 밤이었다.
오늘은 금요일. 조금 있으면 아이들이 등교할 테니 나는 일찍 떠나야 했다. 야영 장비를 거두며 혹시나 쓰레기 등 나의 흔적이 남아 있을까 주위를 살펴보았다. 맘 같아서는 교문에서 등교하는 아이들을 맞아주고 싶었다. 교문을 나오면서도 하루 사이에 정이 들었는지 자꾸 뒤를 돌아다봤다. 이 깊은 산골 초등학교에 다시 와보기는 쉽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애틋한 추억을 가슴에 담고 아쉬운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제 걸어왔던 6번 국도를 따라 걸으며 국토횡단 7일 차를 시작했다. 이 길을 계속 걸으면 횡성군 둔내면에 도착한다. 아침 6시 반을 조금 넘긴 시간, 아침 세상이 모두 내 것이었다. 나는 신이 나서 일부로 갈지자로 걸어보기도 했다. 조금씩 오르막인 거 같긴 한데 경사가 있다는 느낌은 안 들었다. 방금 걷기를 시작하기도 했고 아침 기분도 한껏 고조되어 있으니 웬만한 고개는 어렵지 않게 넘어가겠다 싶기도 했다. 2,3km를 더 가니 진짜 고개다. 경사가 급한 고갯길이 이어졌다. 경사도가 5~6%는 될 듯했다. 황재(일명 황고개). 해발 500m의 낮지 않은 고개였다. 어린 아이 기분으로 아침 황고개를 넘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 이 고개를 넘으면 내리막은 수월할 테니 즐거운 맘으로 걸어 올라갔다. 험준한 고갯길 산을 오르는 것이니 올라갈수록 공기가 상쾌하고 선선한 바람도 더해 오히려 기운이 돋았다. 나는 한껏 여유를 부리며 저 밑에서 낑낑대며 올라오는 화물차를 비웃듯 손도 흔들어 주었다. 정상까지의 5km를 금방 올라온 느낌이었다. 그러니 내려가는 길은 저절로 걷는 듯 가벼웠다.
6번 국도 경강로. 이 도로는 전형적인 강원도 산골짜기의 길인지라 좌우 앞뒤로 온통 숲과 길 뿐 집들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내리막을 걷기 시작하는데 오른편에 한옥 모양의 집이 보였다. 근데 마당에 십자가가 있다. 십자가만 없다면 영락없는 서울 강남 갈빗집 식당같이 근사하게 보이는 교회였다. 그만큼 교회의 티가 안 났다. 나는 황고개 정상에 이런 교회가 있다는 게 신기하여 교회 앞마당으로 들어가 봤다.
서울에서 목회 활동하다가 18년 전 고향인 이곳으로 이주하며 한옥모양으로 교회를 지었으며 현재 신도는 15명인 교회. 주변에 집이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을 수가 없는데 이나마 모인다는 게 신기했다. 나이 드신 목사 부부가 커피를 내왔다. 강원도는 대부분의 마을이 성황당을 믿는 전통으로 전도가 어렵다며 처음에는 부부 두 명이서 예배를 봤단다. 한옥으로 지은 연유를 묻자 그냥 한옥이 좋아서라고 목사님이 대수롭지 않게 얘기한다. 처음에는 십자가도 안 달았는데 가끔 차타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곳이 식당이냐고 물어서 달게 되었단다.
목사님 말씀 중 사모님이 귀띔해주었다. 목사님이 6년 전부터 눈이 안 보인다고. 놀란 나의 표정을 느낌으로 알았는지 목사님이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처음 눈을 잃게 되었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냐는 나의 질문에 처음엔 그러기도 했지만 지금은 모든 게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산다는데 그 말을 하는 목사님이 성자로 보였다. 나는 강원도 깊은 산골짜기에서 성자를 발견했다. 헤어지며 인사를 나누는데 목사님은 이미 교회 구석구석이 익숙한지 난간을 자연스럽게 붙잡고 내려와 내게 인사를 건넸다. 그 모습을 보면서 또 한 번 내 맘은 뭉클해졌다. 나는 달리 인사의 방법을 못 찾아 사모님께만 정중히 머리 숙여 인사드리고 교회를 나섰다.
황고개를 내려오면서 삶에 대해 한참을 생각해 보았다. ‘왜 살지?’ 왜 걷냐는 질문보다 더 어려운 질문이었다. 황고개를 걸어 내려오며 인생, 삶이란 단어는 나를 깊은 상념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렇게 심드렁하게 걸어서 내려오니 둔내 면내가 2km앞이었다.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상념을 접자 육체가 반응했다. 나는 점심으로 짜장면을 결정했다. 황고개 내려오며 한 여러 상념은 결국 나의 어머니와의 기억으로 연결되었다. 나는 국토종단 3일 차에 짜장면을 먹기 위해 오후 3시까지 점심도 거르며 걸은 적 있다. 경기도 광주시로 걸어가던 그땐 배고픔에 먹고 싶었지만 지금은 어머니가 그리워서 그렇다.
우리 집은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로 이사 왔다. 서울에서 크게 성공하신 고모부의 덕으로 그나마 서울에 작은 집이라도 얻을 수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 와서 나는 처음으로 사람은 두 종류의 부류가 있다는 걸 알았다. 돈 있는 사람과 돈 없는 사람. 내가 살던 집의 이웃 동네는 부자들이 사는 동네였는데 그런 집들은 대개가 담이 높아 집안이 잘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높은 담벼락 위에는 철조망을 쳐놨거나 깨진 유리병 조각을 심어놔서 나는 그 담벼락 길을 걸어 하교할 때는 지레 무서워 담과 좀 떨어져 걷곤 했다.
서울로 이사 온 그다음 해 2월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졸업식은 부잣집 아이들의 상장 잔치였다. 무슨 이름 붙은 상장은 죄다 부자동네 애들의 차지였다. 나머지 아이들이 받은 유일한 상은 개근상이었다. 우리 부모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아파도 학교는 가야 한다면 떼밀고 했으니깐.
내 졸업식에 어머니는 낡고 오래된 한복을 입고 오셨다. 특별히 입고 올 옷이 없기도 했다. 시골에서 올라온 지 얼마 안 되어 먹고살기 바쁜 1970년대 초 어머니가 뭔 호사로 옷을 사겠는가? 학기 중에 전학 왔으니 1년짜리 개근상도 못 받은 내가 불쌍해 보였는지 어머니는 나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걸어갔다. 중국음식점이었다. 그 당시 짜장면은 최고의 외식이었다. 어머니는 자기의 짜장면 반을 내게 덜어주며 그렇게 나의 졸업을 축하해주었다. 지금도 나는 가끔 짜장면이 먹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오래전 돌아가신 내 어머니의 기억에 눈물이 맺히곤 한다.
한 시간 뒤에 둔내 면내에 도착하면 허기도 있을 테니 벌써 입안은 군침이 돌았다. 둔내 면내는 크진 않지만 아늑하고 소박한 시골 장터의 느낌이었다. 번잡한 걸 싫어하는 나는 조그만 읍내, 면내에 오면 정서적으로 안정감이 느껴진다. 우선 나는 둔내 면내를 한 바퀴 돌아보고 시골 면의 분위기를 느껴 보았다. 걷다 보니 역시 맘이 차분해졌다. 짜장면 집을 찾아보기로 했다. 면내는 터미널을 중심으로 일이백 미터 내에 모든 게 있어 중국음식점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둔내터미널 맞은편에 있었다. 아침 6시 50분에 출발하여 13km를 걸었고 황고개 동산교회에서 한 시간 머물다 왔으니 오전 11시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점심이 약간 이르긴 하나 허기도 느껴지고, 오후에는 오늘의 두 번째 고개인 해발 890m의 청태산 고개를 넘어야하기에 든든히 먹어야 했다. 짜장면은 바로 나왔다. 곱빼기의 양이었다. 밑바닥까지 긁어 비웠더니 내가 안쓰러웠는지 방금 한 밥이 있다며 준다는데 짜장면의 양이 얼마나 많은지 더 먹을 수가 없었다. 알고 보니 주인은 내가 국토횡단 하는 걸 알고서 면을 곱빼기로 담은 것이었다. 중국집 주인은 장평 가는 청태산 넘는 길을 자세히 가르쳐주었다. 그는 산이 꽤 높고 경사가 길게 이어져 걷기에 만만치 않으니 조심해서 넘으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