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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

by 허무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지나치게 안으로 안으로 파고들어간 탓일까. 괜히 어지러운 현대 사회 탓을 하고 싶어진다.

언젠가부터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나를 좀먹기 시작했다. 그럴때면 나는 오히려 그 감정들을 동력삼아 내가 쓰는 글들이 더욱 풍부해질 것이라는 허황된 희망에 오히려 기댔다.


어느 순간, 그 '외로움'이 '불안'을 데려왔다.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내 인생이 우왕좌왕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몇 주나 지나고서야 견딜 수 없어진 나는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병원으로 향했다.

굳이 사회생활을 하지 않는 내가 정신과-요즘엔 다들 '정신건강의학과'라고 하는 듯 하다-의 출입을 두려워 한 것은 아니다. 그저 건강, 특히 정신건강에 있어서 무모한 자신감이었던 것 같다. 아파서 병원에 가는 자연스러운 일이 나에겐 또 하나의 '패배'처럼 낙인이 될 것만 같았다.


약을 먹고 나서 몇일이 지났을까. 신기할만큼 감정이 평이해졌다. 잔잔한 호수가 아니라, 무감각한 느낌에 가까운 상태였다. 모든 감정이 0에 수렴해서 안정적이긴 했지만, 희한하게도 글을 쓸 수 없었다. 정확히는 스토리를 지어낼 수가 없었다. 다른 때 같으면, 그 자체 만으로도 조급해지고, 불안한 마음이 들었을텐데 그런 생각도 전혀 들지 않았다. 마음이 잠잠해지니, 이번엔 몸이 신호를 보낸다.


아마 광복절 전날 저녁부터였던 것 같다. 오른쪽 발 뒷꿈치, 아킬레스 건이 있는 쪽이 발을 디딜때마다 시큰거려 똑바로 오른발을 디딜 수 없었다. 연휴 내내 절뚝거리다가 새벽에는 어찌나 욱씬대던지, 잠을 잘 수 없었다. 절뚝거리는 발걸음으로 정형외과를 갔다. 이것저것 검사를 했다. 하루에 80%는 책상에 앉아있는 나에게, 의사는 하루종일 서 있는 일 하냐고 묻는다. 아킬레스 건염 이라고 했다. 주사요법이라고 정말 눈물 찔끔 날 만큼 아픈 주사를 찔러넣고 휘휘 젓는 듯 하더니 거짓말처럼 말끔해졌다.


병원에서 집까지 일부러 삥 둘러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을 사들고 집으로 왔다. 오전 시간인데도 등이 흥건하게 젖어왔다. 집에 도착하니 다시 시큰시큰 아파오기 시작한다. 그래도 다음주 오라고 한 정형외과에 나는 가지 않을 것이라고 혼자서 다짐을 했다.


한 군데가 좀 나으면 다른 곳이 아프고, 어떤 일이 해결 되면 다른 일이 터진다. 건강이라는 것이 평소부터 그리고 좋을때부터 지속적으로 신경쓰고 관리해야 하는 것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이미 인생의 절반을 넘게 살았는데 지난 시간을 탓하고 후회한들 방법은 없다. 살다보니 그런것 같다. 그냥 하나하나 닥쳐오는대로 풀고, 해결하고, 넘기고... 그러다 보면 또 좋은 일들이 겹겹이 다가오는 좋은 날도 있고.

수도 없이 해 왔던 나의 나태에 대한 또 한번의 '변명'을 내 스스로 해 본다.

시간은 쉬지 않고 흐른다. 지금이라는 순간에, 변명 하나를 이정표처럼 세워둔다.

다시 나를 시간에 맡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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