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의 새 어린이집 적응기간은 총 나흘이 걸렸다. 적응기간이 시작되기 전, 나와 남편은 최대로 쓸 수 있는 휴가 일정을 공유했다. 아무래도 초반에는 엄마가 있는 게(다른 아가들도 거의 엄마가 오니까) 아가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내가 사흘 휴가를 내고 더 필요하면 남편이 하루 이틀 정도 휴가를 내기로 결정했다. 걱정이 많이 됐지만, 돌 전에 처음으로 간 어린이집 적응 기간도 짧았던, 우리의 아가를 믿기로 했다. 돌 전 아가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냉정한 엄마 취급받았는데 그 말들을 쏙 들어가게 해 준 효녀니까.
새 어린이집 OT 일정이 평일에 잡혀서 휴가를 냈다. 직장인 부모를 배려해서 토요일에 진행하는 곳도 있다는데 아쉽게도 그러지 않았다. 아빠도 올 수 있게, 아니, 맞벌이하는 부모가 모두 올 수 있도록, 적어도 어린이집 OT는 주말에 진행하면 좋겠다. 육아는 엄마만의 몫이 아닌, 부부의 몫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하루빨리 어서 잡히길 바란다.
어린이집에서 진행할 프로그램 설명을 들었다. 교육보다는 보육이 중요한 시기이니, 그저 잘 먹이고 잘 재워주고 잘 놀아주면 좋겠는데,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니 부담스러웠다. 추가 비용이 발생하는 만큼 선택권이 있으면 좋겠지만 역시 그런 건 없다. 특히, 영어 프로그램은 하고 싶지 않아서 고민이다. 우리말부터 자리 잡고 나서 외국어를 접하게 하고 싶은데, 우리 아가만 안 한다고 하기도 그렇고, 내 소신 지키겠다고 아가가 하고 싶은 걸 못하게 하는 것일까 봐 두렵기도 하다.
OT를 마친 후, 영유아 종합검진을 받으러 소아청소년과에 갔다. 영유아 종합검진은 토요일에 받기 어렵다. 무료 검진이다 보니, 환자가 몰리는 토요일에는 대부분 진료만 보기 때문이다. 휴가 낸 평일에 웬만한 것은 다 해야 하는 맞벌이 부모는, 언제나 시간이 부족하다.
오전에 어린이집 등원. 어색한지 나한테서 떨어지지 않던 아가는, 차츰 어린이집 장난감에 관심을 보이며 탐색하기 시작했다. 엄마 따위 신경도 안 쓰고 실컷 놀던 아가. 분리 불안 따위 없는 아가. 놀다가도 '엄마' 찾으며 안기는 다른 아가들을 보면 서운한 마음도 들었지만, 그래도 고마움이 더 컸다.
한 시간 정도 지나서 집에 갈 때가 되자, 더 놀겠다며 점퍼를 안 입겠다고 버티는 아가. 결국, 선생님께 양해를 구하고 조금 더 있다가 나왔다. 나올 때는 세상 쿨하게 선생님들에게 "안녕!".
집에 가는 길은 험난했다. 충분히 논게 아니었는지, 오랜만에 놀아서 좋았는지, 어린이집 주변 놀이터에서 두 시간 넘게 있었다.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하원 할 때마다 놀이터에 들렀던 악몽(?)이 떠올랐지만, 이젠 내가 아가를 잡고 미끄럼틀에 오르락내리락하지 않아도 될 만큼 아가가 컸기 때문에, 아가가 발을 헛디지지 않는지 따라다니면서 잘 지켜보기만 하면 돼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아기띠 메고 안전하게 탈 수 있던 그네는, 아가 혼자 태우기는 안전하지 않고 같이 타기에는 버거워서 더 힘들었다. 하나가 괜찮아지면 다른 하나가 힘들어지는 게, 바로 육아다.
집에 돌아와서 아가에게 점심을 먹이고 낮잠 재우면서, 나도 자버렸다. 아가가 낮잠 잘 동안 할 일을 계획해놨는데 못했다. 나도 알게 모르게 긴장했나 보다. 결국, 나는 점심을 먹지 못했다.
다른 아가들보다 적응 기간을 짧게 잡을 수밖에 없다 보니, 2일 차에는 어린이집에 더 있으면서 낮잠도 자고 점심도 먹길 바랐지만(잠잘 때 찾는 인형과 점심 식기도 챙겨갔다.), 1일 차와 동일하게 진행되었다. 원의 계획도 있을 테니 별말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단, 내가 3일 동안 휴가를 냈으니 3일 차에는 원에서 낮잠을 자봤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하원 후, 역시 놀이터에서 한바탕 놀았다. 집에 돌아와 곯아떨어진 아가를 보면서,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기도 하고, 부모의 일정에 맞추느라 아가를 힘들게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아가가 안쓰럽다.'며 나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사람들 덕에 그런 생각이 더 든다. 내 걱정을 해주는 사람은 동료 엄마들 뿐이다.
아가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면서 저녁을 먹이고 있는데, 예전 어린이집 선생님께 연락이 왔다. 아가가 잘 적응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연락 주셨다고 했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줄어들었다고 생각한 내 인복이, 아가를 낳고 기르면서 다시 생기는 것 같다. 낮잠이라는 고비가 있다는 내 말에 선생님들은, 우리 아가는 엄마와 애착 형성이 너무 잘 되어 있어서 잘 적응할 것이라고 말씀해주셨다. 선생님들의 말씀에 다시 한번 마음을 다 잡게 됐다. 아가도 선생님들이 보고 싶었는지 예전 어린이집 가방을 찾아 한 동안 꼭 안고 있었다. 아가와 함께 가방에게 "안녕"한 후에 가방을 수납장에 넣었다.
원에서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자기로 했다. 점심 식기를 챙기고 나서, 아가에게 어린이집에 데려갈 친구를 정하게 했다. 워낙 잘 먹기 때문에 점심 걱정은 없지만 낮잠이 걱정됐다. 놀기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는 우리 아가는, 잠들지 않고 놀려는 마음이 있어서인지 잠을 이겨내려 하기 때문이다. 담임 선생님께 아가의 잠버릇에 대해 미리 말해놓았지만, 아가가 잘 잠들지 걱정됐다. 혼자 집에 오는 발걸음이 너무 무거웠다.
오후에 어린이집에 갔다. 아가는 낮잠을 못 잤다고 했다. 그래서 어제 원에서 낮잠을 자보길 원했던 것인데 아쉬웠다. 낮잠 자는 것까지는 봐야 할 것 같아서, 다음 날에 남편이 휴가를 쓰기로 했다.
나와 함께 하는 적응 기간 마지막 날이기 때문에 아가와 함께 밖에서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유모차 안에서 아가는 푹 잠들었다.
나는 직장에 출근하고, 남편이 아가의 등 하원을 하기로 한 날, 직장에 있으면서도 아가가 낮잠을 잘 잤을까 걱정됐다. 아가는 잠들기를 거부하며 엄청나게 울었다고 한다. 결국, 집에 있던 남편은 아가를 데리러 어린이집에 갔고, 남편이 원에 도착하기 전에 아가는 진정이 되었지만, 이미 하원 준비를 마쳤기 때문에 집에 데려왔다고 했다.
나와 남편 중에 한 명이 하루 휴가를 더 쓸까 생각도 해봤지만, 원장 선생님과 담임 선생님이 아가를 잘 재워보겠다고 하셔서 다음날부터 종일반에 맡겨보기로 했다.
이런 아빠가 없다는 선생님들의 칭찬을 한참 들었다. 엄마인 나는 3일 동안 그런 말 들어본 적 없는데 말이다. 엄마가 하는 건 당연하고 아빠가 하는 건 대단한 일이 되는 육아, 이런 인식은 언제쯤 바뀔 수 있을까. (육아의 1%만 해도 좋은 남편이자 좋은 아빠)
출근할 때 자고 있는 아가를 보니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하지만 어린이집 1년 수료(?) 경험이 있는 우리 아가를 다시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등원 잘했다는 남편 연락을 받고 나서 애써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아가가 잘 지내겠거니 생각하면서 원에 연락하지 않았다. 선생님에게 부담 주기도 싫었고.
퇴근할 즈음 연락이 왔다. 힘들어하긴 했지만 잘 잤고, 친구들과도 즐겁게 지냈다고 한다. 아무래도 적응기간이다 보니 친구들과 엄마들이 들락날락하고, 익숙하지 않은 낯선 환경이라서 그랬나 보다. 짧은 기간에 잘 적응해준 아가와 힘드셨을 선생님들께 감사한 마음 한가득이다.
아가는 잘 적응하고 있다. 우리 부부의 적응 기간은 현재 진행 중이다.
내가 출근한 후, 남편은 아가를 깨워 기저귀 갈고 옷 입혀 등원한다. 잠이 덜 깬 아가를 대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야근하지 않으려고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일만 하다가 퇴근한 후, 꽉꽉 찬 지하철과 버스를 타며 원에 도착해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아가와 만나 하원 한다. 간단히 저녁을 먹고(예전 어린이집에서는 저녁도 챙겨주셨는데 여긴 안 된다고 한다.) 놀다가 재운다.
이사를 와서 출퇴근 시간이 오래 소요되다 보니, 피곤이 쌓이고 있다. 주말만 기다리게 된다. 아가를 챙겨야 하니 주말에도 푹 쉬진 못하지만, 그래도 출퇴근으로 피곤하지는 않으니까.
적응 기간을 잘 마무리하고 싶다. 여성의 경력 단절이 가장 많은 시기는 아가의 영유아 시기와 초등 저학년 시기. 이 시기를 잘 넘겨야 경력 단절이 되지 않을 텐데 고민이다. 경력에 도움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는 이 상태로 머물까 봐 두렵기도 하다. 더 늦기 전에 내가 하고 싶은 일로 이직하고 싶은데 현실은 녹록지 않다.
이런 상황인데 둘째는 무슨. 도와줄 것도 아니면서 둘째가 있어야 한다거나, 아들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 등, 막 소리 하는 그 입들 좀 다물어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