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들이 읽는 책이 궁금한 이유를 생각해 보면 그 너머에는 그 사람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도대체 어떤 책을 읽고 그렇게 멋진 사람이 되었는지 나도 좀 알고 싶은 마음도 있고 말이다. 몇 년 전 좋아하는 친구에게 요즘 무슨 책을 읽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로버트 마우어의 《아주 작은 반복의 힘》은 그렇게 해서 읽게 된 책이다.
마우어는 ‘혁신’에 대한 설명으로 책을 시작한다. 살다 보면 누구나 변화해야 할 때가 온다. 그럴 때 우리는 보통 혁신적인 변화를 꿈꾼다. 순식간에 운전을 잘하고 싶고, 순식간에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게 되는 상상을 하지만, 어쩐지 그럴 때마다 현실은 이상과 다르다는 쓰라린 경험을 안고 원래의 아늑한 습관으로 돌아가곤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코 변할 수 없는 것인가. 미라클 모닝 같은 혁신은 부지런함의 씨앗을 속에 타고 난 사람들만의 일이란 말인가. 그게 사실이라면 고생스럽게 이런 책을 썼을 리가 없으니, 다행히도 혁신에는 대안이 있다. 그것을 이 책에서는 ‘스몰 스텝 전략’이라고 부른다. 저자는 스몰 스텝 전략을 이렇게 설명한다. ‘삶을 변화시키는 전혀 다른 전략이다. 아주 부드럽게 언덕을 올라가는 방법으로 언제 정상에 올랐는지 눈치채지도 못한다.’ 그러니까 누가 눈치채지 못하느냐 하면, 그건 바로 편도체다.
지구에 사는 포유류라면 중뇌 속에 누구나 가지고 있는 편도체는 우리가 커다란 위험을 마주했을 때 도망치거나 싸우거나, 즉각적인 행동을 취하도록 경고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문제는 편도체가 위험으로 인식하는 것은 맹수의 공격 같은 일만이 아니라는 데서 생긴다. 우리가 안전한 일상에서 벗어나 새롭게 변화하려고 할 때나 심리적으로 부담되는 큰 일을 앞두고 있을 때 편도체는 이런 일들을 위험으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편도체에 비상이 걸리면 뇌의 다른 기능들은 중단되는데, 그런 것들이 대뇌피질에서 담당하는 이성적인 생각과 창의적인 생각이다. 버리고 싶은 습관으로부터 변화하는 일이 어렵다거나, 잔뜩 긴장하고 걱정한 일의 결과가 좋지 못한 적이 있었다면 그건 겁먹은 편도체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스몰 스텝 전략을 사용해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궁금하다면 책의 나머지 부분을 확인하시길. 아무튼, 이렇게 길게 책 이야기를 늘어놓은 이유는 속셈이 따로 있기 때문이라는 걸 고백해야만 한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소설을 쓰고 싶은데 어떻게 쓰는지 모르겠다는 게 문제였다. 편도체 같은 구석이 있는 나로서는 소설을 쓰겠다는 거창한 목표를 세우는 것도 영 내키지 않았다. 내가 화자가 아닌 글을 한 줄도 써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한 줄만 써보는 건 어떨까. 그래서 내킬 때마다 내키는 이야기를 내키는 만큼만 쓰기로 했다. 글이 돼도 상관없고 안 돼도 상관없다. 그냥 쓰는 것이다. 그래서 스몰 스텝에 대한 이야기는 이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이다.
[습작노트]
길을 걷는 동안 그의 눈에 들어온 건 저마다 짝을 지어 걸어가는 사람들이었다. 오후 수업이 막 끝난 대학가의 카페에는 빈자리가 없었고, 웃음소리가 큰 남자들 한 무리는 벌써 근처의 주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신호등의 불빛이 초록으로 바뀌었다. 그는 무작정 인파에 섞여 들어 길을 건넜다.
점심을 먹으며 은혜는 오전에 과방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말했다. 모 선배가 성년의 날을 맞은 신입생 누구에게 준다고 장미를 사 왔는데, 그게 꽃 한 송이가 아니라 커다란 꽃다발이더라, 그걸 보고 누구는 로맨틱하다고 했으며 또 다른 누구는 그 일을 두고 뒤에서 비웃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는 그런 건 좀 부담스럽다며, 포크를 드는 둥 마는 둥, 음식을 이리저리 밀기만 하면서 발갛게 달뜬 얼굴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은혜의 오른편 테이블 위에는 저마다 비슷한 듯 조금씩 다르게 포장된 빨간 장미 여섯 송이가 작은 더미를 이루고 있었다.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에는 벌써 초여름의 기운이 가득했다. 걷다 보니 어느덧 중심가에서 멀어져 있었다. 널찍한 대학 부속 병원 부지를 걷는 동안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나타났다 사라질 뿐이었다. 지하철 역 입구의 표지판에 불이 창백하게 들어와 있다. 인물이 하나도 없는 비현실적인 도시 풍경을 보는 것 같은 기분에 그는 괜히 주변을 둘러본다. 모두 어디로 가버린 걸까. 포근한 날씨 때문에 해가 늦게까지 머무르는 것 같았지만 사라질 땐 순식간이다. 발뒤꿈치가 쓰라려 확인해 보니 단단한 로퍼 뒤축에 살이 쓸려 피가 번져있었다.
벤치를 찾아 앉아 이렇게 된 건 다 피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고 생각하며 가방에서 파우치를 꺼낸다. 파우더 케이스와 립틴트 따위의 틈에 밴드 네 장이 줄줄이 붙어서 들어있다. 반을 드득 뜯고 포장지를 찢어 쓸린 곳에 밴드 두 개를 서로 조금씩 겹쳐 붙인다. 그는 툭 튀어나온 발꿈치를 손으로 문지르며 생각한다. 그 일이 일어난 건 열두 살 무렵이었다.
그래서 쓴 글 조각이 이렇게 네 문단이다. 그러나 실망할 것 없다. 끝을 내진 않았지만 시작을 했으니까. 하지만 들뜰 것도 없다. 나는 그저 중도(中道)에 머물고 싶을 뿐이다. 간절한 소망이다. 그러나 간절하면 편도체가 또 귀신 같이 알아챌 테니 마음대로 간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마음이 들 때면 생각나는 노래가 있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등산은 왜 할까’. 창작자의 의도가 어땠든 나로서는 이 곡을 들을 때마다 중도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간절한 마음을 가사 속에 숨겨서 과거로 향하는 시간 속에 음악과 함께 떠나보낼 뿐이다. “나는 그냥 아무렇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런데 노래를 다시 반복해서 듣다 보면 다른 가사가 귀에 새로 들어온다. “내가 지금 마음이 차가운 건 따뜻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야” 이 구절을 들을 때마다 내 눈에는 왜인지 그냥 아무렇지 않았으면 좋겠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솟아나는 삶에 대한 사랑이 보이는 것 같아 다시 다정한 마음이 되고 만다. 다정하게 생각해보면 이 글이 부끄럽다는 건 마음에 드는 글을 썼던 적이 있었기 때문 아닐까. 계속 쓰다 보면 언젠가 또 마음에 드는 글이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려면 따뜻한 마음과 차가운 마음을 오가며 한 장 한 장 연습장을 채워나가는 수밖에.
《아주 작은 반복의 힘》, 로버트 마우어, 스몰빅라이프
‘등산은 왜 할까’, 작사 작곡 장기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