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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사리 Dec 06. 2023

가방에 담긴 이야기의 무게


얼마 전 한국에 다녀왔을 때의 일이다. 시기상으로는 9월 초였지만 느끼기엔 꼭 한여름 같았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살이며, 열기가 가득 실린 밍밍한 바람. 자꾸만 솟아나는 땀을 닦으며 지하철역 계단을 올랐다. 손수건을 가져오기 잘했다고 생각하며 몇 미터 앞에 있는 광역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내가 타야 하는 버스는 이미 다녀갔는지 서서 기다리는 사람은 없었다. 단지 정류장 표지판 바로 앞에 가방이 하나 놓여있을 뿐이었다. 주변에는 찜통 같은 더위 속에서 다른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 서있었고, 저만치 뒤쪽에 조그만 그늘이 내린 곳에는 탑승 순서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몇 사람이 앉아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거 좀 얄밉지 않아?” 나를 툭툭 치며 일행이 말했다. 잔뜩 목소리를 낮춘 채였다. 가리키는 곳을 보니 주인 없이 혼자 버스를 기다리는 예의 그 가방이다. 모르는 척 가방이 왜 얄밉느냐고 물어보고 말하는 걸 들어보니,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는 그의 입장에서는 가방으로 자리를 찜하고 시원한 그늘에 앉아 쉬는 가방 주인이 미워 보였던 모양이다. 듣고 보니 일행은 날씨가 너무 더워서 지친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진짜 문제는 가방 주인이 아니라 더워도 너무 더운 날씨 아닌가. “그럼 그늘에 가서 쉬다가 버스 오면 와서 타.”라고 말하자 괜찮다고 한다.


“다리가 아파서 그러는 거 일수도 있어.” 잠깐의 침묵이 머문 뒤에 나는 고갯짓으로 가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가, 라고 답하는 일행의 얼굴에는 의심이 조금은 섞여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이십여 분동안 손수건은 쉴 틈이 없었다. 비 내리듯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야 했고, 더위에 지친 속을 울렁이게 만드는 매연 냄새가 짙어질 때마다 입과 코를 막아야 했다. 그렇게 가만있지 못하고 뙤약볕 아래 한참 서있는 동안 반가운 오렌지 색의 버스가 저 앞 빨간 신호에 걸려 멈춰 선다. 눈을 찡그려 번호판을 읽니 그렇게나 기다리던 나의 버스다.


신호가 초록 불로 바뀌고 버스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저 뒤 그늘에 앉아 있던 가방 주인이 나타난다. 칠십 대 초반쯤일까? 짧은 파마머리를 한 작은 체구의 여자는 등이 굽었고 무릎도 굽었다. 일행을 돌아보고 입모양으로 ‘맞지?’ 했다. 미운 마음이 사라지고 겸연쩍은 듯한 미소를 짓는 얼굴이 전보다는 훨씬 편해 보여 보기 좋다. 걸음이 느린 가방 주인이 버스에 오르는 걸 저만치 떨어져서 기다리다가 뒤따라 버스에 올랐다. 에어컨이 켜있는 버스 안은 시원했다.


버스 정류장에 혼자 놓인 가방을 보고 가방 주인의 처지를 예상했던 나에게는 엄청난 초능력이 있었던 걸까? 그렇다면 좋겠지만 사실 나는 초능력 같은 건 없는 시시한 사람이다. 초능력 때문이 아니라면 나는 만물의 이치를 다 알고 있는, 대단한 도와 덕을 겸비한 성인 군자 대인배라도 된단 말인가? 그렇다면 정말 좋겠지만 그럴 리가. 그럼 도대체 어떻게 자리를 찜한 가방을 보고 저 짐의 주인은 다리가 아프다는 생각을 했던 걸까?


시시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시시한 것들이다. 시시하게도 나는 그저 가방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연한 녹색의 질긴 합성 섬유로 만든 큼직한 손가방은 바닥이 넓어서 짐을 많이 넣을 수 있는 모양새였다. 지퍼가 달려있었지만 빈 공간마다 짐이 야무지게 꼭꼭 들어차 있어서 지퍼는 잠기지 않았다. 그런 가방의 모습을 보고 나이 많은 여자의 짐이라는 걸 상상했을 뿐이다. 열려 있는 가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들의 무게를 가늠했을 뿐이다. 그래서 사람 없는 버스 정류장에 가방 혼자 내버려 두고 그늘에 앉아 쉬어야만 했던 이유가 있을 거라는 걸 이해했을 뿐이다.


우리는 저마다 나름의 이야기를 갖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야기 자체일지도 모른다. 이야기 없이 지금까지 지속된 인생은 없을 테니 말이다. 내가 가방에 담긴 말없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건 나의 이야기가 한 번이라도 온전히 이해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해받은 사람은 이해해야만 한다. 아니, 어쩌면 이해받은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걸지도 모른다.



[습작노트]

“음식 나왔습니다.” 별 반응이 없다. “저, 손님, 테이블 치워주시겠어요? 음식 나왔습니다.”
그제서야 “엇!” 하며 급히 테이블에 세워둔 핸드폰을 치운다. 진아는 그 모습을 말없이 쏘아보고 있었다. 젓가락을 들고 국수 가락을 입으로 밀어 넣고 있다. 저 뜨거운 걸. 식히지도 않고. 자기 앞에 음식을 내려놓는 직원에게 과한 감이 없지 않게 목소리를 높여 감사하다고 말한다. 활짝 당겨졌던 얼굴 근육을 곧바로 풀고 다시 어딘가 불쾌한 표정이 된다.
“그래서, 보자고 한 이유가 뭔데.”
방금 전 직원에게 말했던 목소리에서 한 옥타브 정도 내려간 음성으로 문장을 끝낸다.
“좀 먹고.”
눈도 마주치지 않고 고추 양념을 더 풀어 넣는 진호의 모습을 바라보며 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국수를 먹느라 진호는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담배를 사서 편의점을 나서며 진아는 한동안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진호에게 사과를 들을 거라고는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변명은 할 줄 알았는데, 뭐라고 말하든 일단 들어는 보겠다고 생각했는데, 전부 쓸데없는 일이었다. 바람이 찼다. 팔짱을 끼고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마침 집으로 가는 버스가 지나쳐간다. 멀찍이 사거리에 멈춰 서는 버스를 보며 그냥 타고 갈 걸 그랬나, 생각한다. 횡단보도에 멈춰 선 진아의 눈에 찬바람을 피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골목 안쪽에 자리 잡은 작은 노점이 들어왔다. 길을 건너 이끌리듯 다가가니 가까워질수록 점점 온기가 강해진다.

하얀 종이봉투를 손에 들고 다시 큰길로 나온다. 다녀갈 버스는 다 다녀갔는지 아무도 없는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음을 재촉한다. 벤치에 앉은 진아는 봉투를 열어 고소한 냄새를 한 번 맡고는 붕어빵을 하나 꺼내 크게 베어 물었다. 금세 입안이 달고 따뜻해졌다. 기분이 좀 나아지는가 싶더니 무슨 일인지 달큼한 것을 씹을수록 진호가 풀어넣던 고추 양념이 자꾸만 떠올랐다. 진호의 말을 듣는 동안 진아는 국수를 건들지도 않았다. 국수는 내내 허여멀건하게 식어갔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나? 붕어빵의 온기가 한숨에 실려 나와 눈앞에서 하얗게 흩어진다. 진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진아는 불안했다. 머리가 잘린 붕어빵을 한 입 더 깨물어 씹는 동안 진아의 머릿속에서 진호는 계속해서 고추 양념을 더 넣고 있었다.

진호는 아버지를 닮았다. 화가 난 건지 고민이 있는 건지 속을 알 수 없는 눈빛,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도, 누구도 꺾을 수 없는 지독한 고집과 그 고집처럼 붙들고 있는 식성까지도. 아버지는 위암에 걸리고서도 매운 음식을 포기하지 않았다. 고집을 부리는 아버지를 보며 진아는 답답했다. 갑자기 목이 멨다. 몸이 반도 남지 않은 붕어빵의 꼬리를 한참 동안 노려보다가 전부 입속에 욱여넣었다.

입안 가득 붕어빵을 씹고 있는데 검은 패딩을 입은 남자가 벤치의 다른 쪽 끝에 와 앉는다. 찬 바람 속에 점심때부터 내내 마신 것 같은 술냄새가 실려있다. 아버지도 저렇게 식도를 타고 넘어간 술이 기체가 되어 살갗으로 스며 나올 때까지 술을 마셨다. 위암이고 뭐고 어차피 죽을 건데 마음대로 하게 놔두라고 화를 냈었지. 진호는 요즘도 밤이면 혼자 술을 마실까? 붕어빵을 씹으면서 진아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담뱃갑을 만지작 거린다. 매끈한 포장을 손으로 감싸 쥐고 엄지로는 뾰족하게 선 모서리를 강박적으로 문질러댔다. 그러다가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 남자는 그때의 아버지와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드실래요?”
진아는 저도 모르게 남자에게 봉투를 건넸다. “좀 식긴 했어요.” 멀뚱히 쳐다보는 시선에 괜히 무안해져 덧붙이는데 남자가 손을 내밀어 봉투를 받아 든다.

저만치 앞 사거리에 신호 대기 중인 버스가 보인다.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털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야, 맛있네. 크림이 들었네.”
진아는 돌아보지 않고 피식 웃는다. 버스가 다가와 멈춰 선다. 덜컹대는 소리와 함께 출입문이 열리고, 가볍게 발을 디뎌 버스에 오른다.

   


고사리 그림  |  <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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