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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사리 Dec 20. 2023

글쓰기에 필요한 초능력

이 시리즈에 연재한 글 중 두 번째 글​에서 나는 초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고 나서 생각해 보니 초능력이란 무엇인가 싶은 것이다. 초능력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보면 처음부터 그런 능력을 갖고 태어나는 사람들도 있지만, 어떤 사고 같은 계기로 새로운 능력을 갖게 되었다는 사람들도 있잖은가. 사고를 당하고 깨어났다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외국어를 구사하게 되었다거나, 고농도의 감마 방사선 gamma radiation 에 노출되고 나서 엄청나게 강해지…… 는 건 아니고, 어쨌든 그런 경험담이나 사례, 혹은 가상의 이야기들을 보면 공통적으로 그런 일이 있은 후에 생존자들은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된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렇게 해서 얻은 전에 없던 능력을 초능력이라고 한다면, 그런 건 나도 하나 있는 것 같은데…… 싶은 것이다.


그 일이 일어난 건 여름휴가 때였다. 지금으로부터 이 년 전의 일이다. 숙소는 외진 곳에 있었다. 시골길을 달려 도착한 그곳은 마을이라고도 할 수 없는, 산 위에 있는 집 한 채였다. 눈앞을 가득 채운 것은 산봉우리들의 파도였다. 오래전 지혜로운 마오리 샤먼이 신성한 땅으로 믿었던 곳은 아니었을까 싶을 만큼 신비로운 에너지가 넘실대는 지표면에서 너울거리는 듯했다. 너른 잔디밭에는 하얀 데이지가 여기저기 피어있었다.


그 일이 일어났을 때 나는 마당을 혼자 다 차지하고 잔디 위에 드러누워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지붕이 해를 딱 알맞게 가려서 눈이 부시지 않았다. 닿을 듯이 가까운 파란 하늘에 부드러운 구름이 떠있었다. 엄청난 기분이었다. 고양이처럼 영역 동물이라도 된 듯, 마당 전체가 (며칠 동안은) 내 구역이라는 생각에 신이 났고, 완벽한 색깔의 하늘과 완벽한 양의 구름, 완벽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바람, 모든 것에 콧노래는 고조되었다. 흥에 겨운 두 발이 노래에 맞추어 왼쪽 오른쪽 리듬을 탔다.


그때였다, 라기 보단 그때였나……? 싶은 정도로 어딘지 모르게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이상한 기분 그대로 콧노래를 이어가는데 이제는 이상한 기분뿐만 아니라 이상한 소리까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삼차원적으로 웅웅대는 소리에 땅바닥에 벗어둔 안경을 쓰고 보니 웬 벌들이 긴장한 듯한 모습으로 주변을 떠다니고 있었다. 그걸 바라보고 있자니, 몸을 반으로 나누었을 때 왼쪽이 점점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머리끝부터 발 끝까지 몸의 반쪽에 퍼진 열기를 추적해 보니 가장 뜨거운 곳은 발바닥이었다. 누워서 발 춤을 추다가 데이지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그 바람에 놀란 벌이 발을 공격한 것 같았다.


방으로 돌아와 창문을 닫고 침대에 누웠다. 반쯤 잠이 드는가 싶더니 과거의 일들이 꿈결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누워서 천장과 나 사이에서 재생되는 장면을 영화 속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라보았다. 어떤 장면이 나타났다 사라지면 새로운 장면이 뒤를 이어 나타났다.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가는 장면들의 연속을 들여다보는데, 이상하게도 화가 난다거나 슬프다거나 하는 감정은 하나도 들지 않고 그저 바라봄 그 자체일 뿐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한 일은 따로 있었다. 과거의 일들이 수도 없이 눈앞에 펼쳐지는 와중에 그 속에는 나의 과거가 아닌 것이 분명한 일들이 드문드문 끼어있었다. 내 기억이 아닌 기억이 눈앞에 떠오르는 것을 바라보며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꿈 속으로 빠져들었다.


SF영화를 보면 자주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누가 봐도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고, 자기 자신마저도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믿는 로봇. 그런 믿음의 근거는 과거의 추억과 어린 시절의 사진이다. 그러나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기억 속의 어린 시절은 사실 처음부터 프로그램된 정보에 지나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진실을 알게 되고, 나는 누구인가, 내가 믿었던 세상은 무엇인가, 수많은 질문과 함께 이야기는 점점 깊은 갈등 속으로 치닫게 되는데…….


그런 꿈을 꾸고 나서 내가 갈등하게 되었다면 영화 같은 이야기가 하나 생겼을 수도 있을 테지만, 그날의 꿈 이후로 나는 자꾸만 과거를 헤집는 일을 그만두었다.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은 더 이상 어떤 의미도 없는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믿는 과거에 대한 기억은 이미 왜곡된 것이었다. 그것은 어떤 진실도 대변하지 않았다. 그저 하나의 이미지, 누구의 기억인지조차 불분명한 의미 없는 이미지가 되어 시간과 함께 나를 지나칠 뿐이었다.


만일 번개를 맞았다거나, 어쨌든 벌에 쏘이는 것보다 약간만 더 큰 일을 당했더라면 조금 더 대단한 초능력을 얻을 수 있었을까? 그건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벌침을 한 대 더 맞았더라면 나의 과거를 새롭게 바라보는 시선뿐만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삶을 내 것처럼 경험할 수 있는 초능력까지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실없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글쓰기에 그것만큼 유용해 보이는 능력은 또 없으니까.


하지만 이미 한 번 제대로 벌침을 맞아봤으니 안다. 글을 쓸 때 정말로 유용한 능력은 내가 가지지 못한 능력이 아니라, 이미 갖고 있는 능력뿐이란 걸.



[습작노트]

  집을 나서는데 바람이 차다. 코트의 깃을 세워 찬 공기가 속으로 스며드는 걸 막았다. 경사진 언덕길을 조금 오르니 얼룩덜룩 어둠이 내리는 하늘과 맞닿은 검은 물결이 눈앞에 나타난다.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날렸다. 버스정류장 옆 벤치에 앉아서 바다를 보며 오늘은 파도가 높네, 생각했다. 그러자 곧 이 도시에 처음 왔던 날이 떠올랐다. 그날 탔던 커다란 페리, 그런 페리가 장난감 배라도 된다는 듯 집어삼키려던 거대한 파도. 기우뚱 거리는 바닥을 위태롭게 디뎌 겨우 꺼내온 비상용 종이봉투를 손에 꽉 쥐고 고개를 팔에 묻은 채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랐었다. 그렇게 다다른 육지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도시 어디에서나 보이는 바다는 이 도시의 삶을 실제보다 더 눈부시게 만들었다. 이곳에서 살 방을 구하고, 직업을 구하고, 그러면서 어울리게 된 사람들, 개성이 넘치는 도시 풍경, 오래된 서점들과 분위기 좋은 카페, 심지어는 비가 오는 바다도, 바람이 휘몰아치는 바다도 모두가 아름다웠다, 한동안은.
  도시에서의 삶은 쉽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 마음이 짙어질 때마다 휴가를 내고 며칠 근교로 여행을 다녀왔지만 그건 쉼표일 뿐, 다시 곧 거대한 도시의 톱니바퀴 속으로 굴러들어가 그 일부가 되어 돌고 돌아야 했다. 다음 얼마간의 휴가가 올 때까지 빙글, 빙글, 빙글. 그런 이야기를 어느 날 같이 일하던 제레미에게 했더니 그는 “거대한 도시의 톱니바퀴……”라는 말을 따라 하더니 그게 어떤 건지 자세히 설명해 달라고 말했다.
  “그건 여러 가지 색이야. 정의할 수 없는 수많은 색. 그냥 기계 부품 같은 색깔의 톱니바퀴가 아니고.”
  제레미는 듣고 있으니 말을 계속 이어가라는 눈짓을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살아있는 유기체이기도 하다는 거야. 기계이면서 동시에 의식이 있는 거지. 그리고 모든 부분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저마다 이상하게 움직이는 거야.”
  그날 카페를 마감할 무렵 제레미가 종이를 한 장 내밀었다. 복사지 뒷면에 검은 마커와 펜으로 그린 그림은 흡사 식물에 가까운 거대한 유기체이기도 하면서 기계이기도 한 톱니바퀴들이 서로 연결되어 커다란 세계를 형성한 것이었다. 그 세계의 꼭대기에는 검은 실루엣의 사람들이 올라서 있었고, 톱니바퀴의 틈새 같은 곳에도 조그만 사람들이 들어서는 빙글빙글 표정 없이 돌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버스가 언덕을 오르는 게 보였다.  

  <다음화에서 계속됩니다>




고사리 그림  |  <꿈>







벌의 공격을 받았던 바로 그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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