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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사리 Jan 03. 2024

지속 가능한 거위와의 글쓰기

처음 연재를 시작하면서 발행 주기를 느슨하게 잡은 건 첫 번째 글 (소설을 대하는 편도체의 마음 [클릭]​) 에서 썼던 ‘스몰 스텝 전략’ 때문이기도 하지만, 소설 쓰기를 연습하는 10주 동안의 변화를 글로 써보겠다는 실험적인 마음 때문이기도 했다. 발행 날짜를 정해두고 글을 써 본 적이 없다 보니 처음에는 미리 글을 써서 저장해 두어야 연재 약속을 지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10주 치의 글을 7주쯤의 부지런한 내가 마음대로 마무리짓는다면 8주부터 10주까지의 나는 발언권을 잃게 되는 것 아닌가. 그래서 매주 한 편의 글을 완성하고, 배운 것이 스며들 시간을 갖고 난 뒤에 새 글을 쓰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다. 미리미리 쓰지 않겠다는 이 속셈을 좀 그럴듯한 말로 포장해 보면 ‘행동-배움-변화’의 순환구조를 따르는 것이라고나 할까.


말은 좋지만 그렇게 쓰다 보면 누구나 맞닥뜨리는 문제가 있다. 수요일에 글을 발행하기 위해서는 이맘때 초고를 써야 하고, 이즈음에는 퇴고에 들어가야 하며, 완성된 글을 쭉 읽어본 뒤에 적어도 이 때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시간관념이 생기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제저녁에 그랬던 것처럼 ‘벌써 금요일인데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군’ 하는 외로운 공명이 대뇌의 주름을 타고 이리저리 떠도는 것이다. 계속 글을 쓸 생각이라면 그럴 때 내가 가진 선택권은 별로 없다. ‘월요일쯤에 떠올라도 충분해’라고 말하는 수밖에. 말하자면 안정제 작전이다.


토요일 아침인 오늘도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월요일, 월요일, 되뇌고 있었다. 푹푹 찌는 날씨에 샤워나 해야겠다고 수건을 꺼내는데, 수건을 손에 잡자마자 번뜩, 하고 생각이 떠오르는 것 아닌가. 가장 진심으로 글 생각을 하지 않던 바로 그 순간에.


그럴 때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떠올리지 않을  없다. 사람들 머릿속에 그런 거위가 살고 있다고 치자. 머릿속 세상에서 길을 걷다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황금알을 하나 발견한다. 주머니에 넣어 돌아와 그걸로 글을 쓴다. 그러다가 어느  또 하나 황금알을 주워오고,  하나 주워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 황금 알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질문하게 되고,  신비로운 거위의 정체를 알게  수밖에 없으며, 어떻게 하면  거위로부터  많은 황금알을 얻을  있을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선을 넘으면 착취다. 거위의 배를 갈랐던 어리석은 사람의 이야기처럼.


요는 아무리 신비로운 거위라도 동물이라는 것이다. 동물이라면 자연의 일부라는 뜻이다. 그 말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도 자연의 흐름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알을 낳는 시기가 있다면, 아무것도 낳지 않고 잘 먹고 잘 쉬어야 하는 때도 있다. 위에서 이야기한 ‘행동-배움-변화’의 순환구조에 ‘휴식’이 꼭 들어가야만 하는 이유다. 휴식 없이 계속 알만 더 낳길 강요한다면 그건 다시 말해서 착취라는 사실. 거위도 이럴진대 내 머릿속은 오죽할까. 매주 글을 내놓느라고 시달린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황금알을 낳아본 거위만이 알 수 있으리라.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머릿속 거위 때문에 번뜩이는 걸 찾아 헤매느라 시간을 다 쓰다 보니, 제때 글을 발행하려면 쓰기 전에 상세한 계획 같은 건 세울 수 없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뭔가를 분석해야 성이 차는 자아가 아쉬운 탓에 다 쓰고 나서 글에 무엇을 담았는지, 뭘 배웠는지 기록하는 일이 습관처럼 자리 잡았다. 때마다 메모장을 열고 그런 기록을 확인하는 일은 그동안 얼마나 자랐는지 문기둥에 눈금을 긋는 일만큼, 딱 그만큼의 조그만 즐거움을 주었지만 작은 것들에 연연하지 않고 자유롭게 쓸 수 있는 힘을 슬쩍 앗아갔다.


별 것 아닌 즐거움을 위해 자유라는 커다란 대가를 포기하다 보니 연재 글 때문에 내가 쓰고 싶은 글을 못 쓴다는 이상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연재는 넘어야 할 산 같은 것이 되고 말았다. 오늘 아침 수건 속에서 발견한 황금알에는 연재 때도 쓰고 싶은 걸 써야만 한다는 사실이 담겨있었다. 그 산이 아직 아담할 때 없애야 쉽다는 사실과 함께. 그런 생각을 한지 얼마나 지났다고 메모장을 열어 이번 글에 담은 것은 ‘중간 점검, 계속 쓰려면 자유롭기 - 산을 만들지 말자’라고 메모를 하고 있으니,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습작노트]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만 해도 길거리에서 담배 자판기라는 걸 볼 수 있었다. 신분증을 제시할 필요도 없고, 나이를 묻는 물음에 답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돈을 넣고 버튼을 누르면 끝, 말 그대로 자판기였다. 큰길에 있는 슈퍼 앞 자판기에 담배 심부름을 다녀오는 건 우리들의 임무였다. 그날도 담배 심부름을 가기 위해 돈을 얻어 집을 나서며 아래층에 사는 진구네 문을 두드렸다.
  “진구야, 담배 사러 가자.”
  현관문 너머에서는 응답이 없었다.
  “진구야, 담배 사러 안 가?”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기척도 없다. 나는 계단을 두 칸씩 뛰어 내려갔다.  

  골목을 따라 내려가면 초등학교 교문이 나왔다. 잠시 문구점 앞에 멈춰 뽑기 기계를 구경했었던 것 같다. 곧 초등학생이 되면 용돈을 받을 테고, 그러면 매일 집에 오는 길에 적어도 하나씩 뽑아볼 수 있을 거라는 달콤한 꿈을 꿨을 테다. 무슨 장난감이 나오는지는 상관없었다. 기계에 달린 작은 틈새에 동전을 한 닢씩 넣고 오른쪽으로 손잡이를 한 바퀴 돌리면 틈새 속 동전이 사라져 버렸다. 마술 같은 기계의 움직임, 손잡이를 돌릴 때의 결연한 심정, 뽑기 기계 속에 가득 들은 화려한 플라스틱 캡슐을 보며 어떤 장난감이 나올까 참을 수 없이 궁금한 마음, 그 많은 캡슐 중 하나가 바깥으로 튀어나오면 그걸 반 갈라 열기까지의 기대감이 뽑기의 진정한 재미라고 믿었던 것 같다.
  “뭐 하냐?”
  형형색색의 뽑기에 푹 빠져 있느라 누가 다가오는 줄도 몰랐다. 진구다.  
  “너는 여기서 뭐 하냐?”
  무릎을 털고 일어서며 내가 물었다. 진구는 태권도장에 다니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언제부터 다녔느냐는 내 질문에 답은 안 하고 새 태권도복을 자랑하며 ‘품새’며 ‘사범님’이며 알 수 없는 말들만 늘어놓았다. 양쪽 주먹을 번갈아 앞으로 내지르면서 입으로는 ‘정신! 통일!’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질러댔다.
  “최진구! 안 오냐?”
  똑같이 태권도복을 입은 애들이 저만치 뒤에서 진구를 불렀다. 키가 큰 애는 흰 도복에 초록띠를 두르고 있었고, 다른 애는 노란 띠를 두르고 있었다. 진구는 흰 띠였다.
  “쟤는 왜 노란색이고 너는 왜 하얀색이야?”
  “하얀색이 좋은 색이야.”
  진구가 말했다.
  “태권도엔 왜 다니는데?”
  “강해져야지. 아버지가 이제 학교에 들어가면 강해져야 한다고 했어. 안 그러면 당하는 거야.”
  우리 아버지도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은데…… 나는 태권도에 안 다니는데……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지만 진구에게 그런 티를 낼 순 없었다. 진구를 재촉하는 애들은 둘 다 롤러스케이트를 신고 있었다. 나는 진구에게 물었다.
  “로라* 타고 놀러 가?”
  친구의 롤러스케이트 한 짝을 빌려서 놀기로 했다는 진구에게 말했다.
  “나도 갈래.”
    *아버지는 ‘롤러스케이트’를 ‘로라스케트’라고 말했었는데, 그 무렵의 나는 아버지의 말과 행동을 자주 모방했었다.

  “맞다, 나 담배 사러 가야 되는데.”
  심부름 생각이 난 것은 롤러스케이트를 한쪽 발에 신고, 신발 신은 발로 땅을 구르며 실컷 놀고 난 뒤였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다행인 건 집에 가려면 큰길을 지날 수밖에 없어서 시간을 더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었다. 자판기 앞에서 내가 담배를 뽑는 동안 진구는 기다려주었다. 내 손에 남은 동전을 흘깃 바라보며 진구가 혼잣말이라기엔 다소 큰 목소리로 말했다.
  “아 배고프다.”
  나는 과자가 잔뜩 쌓인 슈퍼를 바라보았다.
  “안 돼, 거스름돈 아버지 갖다 줘야 돼.”
  집까지 걸어가는 동안 라면땅을 파는 노점을 지났지만 다행히 닫혀 있었고, 문구점 앞 뽑기 기계들은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내려앉자 생기를 잃은 듯 칙칙하기만 했다. 진구와 나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길을 걸었다.
  “야!”
  빌라들 사이의 어두운 틈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배고픈 우리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야! 너네! 꼬맹이들!”
  날카로운 목소리가 귀에 들어와 박혔다. 진구가 뒤를 돌아보았다. 꼬맹이라는 말에 대답하다니, 진구는 자존심도 없는 게 분명했다.
  “이리 좀 와봐라. 꼬맹이들.”
  그 말에 진구는 누가 끌어가기라도 하는 듯 주춤주춤 걸음을 옮겼다. 내가 속삭이듯 작게 말했다.
  “어디 가, 가지 마.”
  진구가 답답해서 나는 속이 탔다.

  우리는 서럽게 엉엉 울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고 나머지 골목길을 걸었다. 비척비척 걸어서 같은 아파트 단지로 향하고, 같은 동으로 향했다. 공동 현관 앞에서 잠시 멈추어 얼룩진 얼굴을 소매로 훔치는 동안 진구는 나에게 어차피 빼앗길 거였으면 과자나 사 먹을 걸 그랬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나는 그에게 태권도를 배워봐야 하나 소용없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눈물과 콧물을 닦고, 말을 삼키고, 우리는 계단을 올랐다. 진구는 코를 훌쩍이며 목에 매단 열쇠를 꺼내 207호의 문을 열였다. 잠시 서로를 말없이 쳐다보는 게 인사라도 된다는 듯, 그렇게 진구네 집 문이 닫혔고, 나는 느릿느릿 한 칸씩 계단을 올랐다.




고사리 그림  |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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