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텃밭 농사는 심어만 놓고 방치하다시피 했었는데, 올해부터는 하나씩 차근차근 배우는 중이다. 봄에 심은 완두콩과 누에콩이 아주 잘 자랐다. 갓 따온 완두콩은 콩깍지를 열어 알맹이를 모으는 동안 하나씩 집어먹으면 옥수수 알처럼 단 물이 톡톡 터지는 게 얼마나 맛있는지 모른다. 싱싱한 콩알 말고도 콩을 심으면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별미가 있다. 바로 콩 순이다. 이름도 이름이지만 생김새도 정말 귀엽다. 완두콩 순에는 고불고불한 팔까지 달려서 더 귀엽다. 텃밭에서 일하다가 하나씩 따먹어도 달큼하고, 넉넉히 따다가 샐러드나 비빔밥에 넣거나, 살짝 볶아서 소금으로 간을 하면 콩 맛이 은은한 연한 잎사귀가 얼마나 맛있는지, 그건 먹어본 사람만 알 수 있다.
텃밭일에 재미를 들린 게 소문이라도 났는지, 지난 크리스마스에 책을 한 권 선물 받았다. 싱그러운 표지 사진이 인상적인 《Hands in the dirt》라는 신간이다. ‘에반스 씨와 함께 직접 먹거리를 길러봅시다(Grow your own kai with Mrs Evans)’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손수 기른 채소로 건강한 삶을 가꾸는 일의 가치가 담겨있다. 이 책을 쓴 리아 에반스(Leah Evans)는 텃밭 가꾸기와 행복의 상관관계를 알리는 일에 열정을 가진 25년 차 농부이자 엄마, 학교와 지역 공동체에서 활동하는 교육자, 활동가이기도 하며, 건강과학(health science)을 전공한 학생이기도 한, 식물처럼 쓰임새가 다양한 사람이다. 어린 시절을 농장에서 보내는 동안 자연스럽게 보고 배운 농부들의 지혜를 나처럼 텃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이런 책을 썼으니, 식물처럼 아낌없이 나누는 사람이기도 하다.
텃밭일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이 책에 의하면 텃밭이 없어도 상관없다. 에반스 씨는 무화과를 화분에서 기른다고 한다. 중요한 건 흙과 식물과 가까워지는 행위 자체다. 책을 읽어보니 텃밭일의 장점은 셀 수 없이 많았다. 밖에 나가 일하는 동안 자연과 연결되고, 그러면서 삶과 죽음의 순환을 이해하고, 조상과 나, 나와 미래 세대 사이의 연결을 발견하는 일. 그건 결국 나 자신과 깊이 연결되는 일이다. 내가 세상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음을 아는 일이다.
자연이 하는 일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생각지도 못한 많은 것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살아있는 식물(질소)과 죽은 식물(탄소), 물과 공기가 모두 함께 탐스러운 퇴비를 만든다는 사실을 언제 생각이나 해보았겠는가. 몇 년이 지나도 썩지 않는다는 패스트푸드점 햄버거 같은 것이 아니고서야, 음식이라면 결국 다 분해돼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퇴비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연으로부터 아주 동떨어져 살던 그 무렵에는 살았던 것이 죽어서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일에 대해 거부감이 있었다. 벌레를 끔찍이도 싫어했으니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루아침에 벌레를 끔찍이 좋아하는 사람이 된 건 아니어도, 텃밭 한 구석 모아둔 퇴비를 들여다볼 때마다 만족스러운 이유는 권모술수가 통하지 않는 작은 우주에서 작은 것들의 법칙을 따라 분주히 돌아다니는 벌레들 때문이다.
퇴비가 만들어지는 걸 들여다보느라 첨단 과학 기술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다 보니, 불멸의 삶을 위해 몸을 냉동하는 서비스가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야 알았다. 전신을 냉동할 수 있는 건 물론이고 심지어는 뇌만 냉동 보존하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렇게 잘 보존하다가 미래에 과학 기술이 발전했을 때 새 몸을 구해 보존된 뇌를 해동시켜 장착하면 새 시대를 새 몸으로, 그러나 여전한 나의 마음으로 살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의 몸을 냉동 보존한다는 SF영화에나 나올 법한 일이 콩이 싹을 틔우고, 콩 순이 자라고, 콩알이 열리고, 콩나무가 죽고, 다시 콩알이 땅속에서 싹을 틔우는 일이 수십 번씩 반복되는 동안 현실이 되었다. 과학 기술이 벌써 이만큼이나 발전했다니 놀랍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다지 놀랍지 않은 일은 신체의 손상 없이 다시 해동할 기술은 아직 발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신을 냉동보존하려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뇌를 보존하면 나의 영혼은 꽁꽁 언 뇌 속에 고이 머무는 걸까. 만일 영혼은 그렇게 보존할 수 없는 것이라면, 영혼 없이 깨어난 인간이 정말 살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냉동할 수는 있어도 해동할 수는 없는 회사가 그렇게 먼 미래까지 존재할까. 회사 관계자가 아니라면 누가 보존된 내 몸을 깨워줄까. 깨워 준다면, 그건 어떤 목적일까. 새로 들어가 살게 될 몸은 윤리적으로 마련한 것일까. 이런 질문들은 결국 나의 뇌를 냉동보존하지 않을 이유와 같은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는 건 자연스럽지 않은 것, 영혼과의 단절된 관계, 알 수 없는 타인의 의도 같은 것들이 내가 갖고 있는 두려움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스스로의 신체를 냉동보존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사람들은 나와 다른 두려움을 갖고 사는지도 모른다. 영영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한 번 더 인생을 살 수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슬픔 같은 것들.
오래된 일을 영원히 보존하려는 마음은 뇌를 얼리려는 마음 못지않게 부자연스럽다. 그대로 담아둔 기억을 다시 꺼내 본다. 어떤 상자 속에는 퇴비가 되지 못한 것이 축축하게 고여있고, 어떤 상자에는 오묘하게 변한 비옥한 것이 들어있다. 또 어떤 상자는 열었더니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있다. 바람이 된 모양이다. 두 편의 글을 쓰고, 두 편의 글을 내리 삭제했다. 그러면서 발견한 축축한 것들을 모아 퇴비 더미에 갖다 넣어야겠다. 시간과 물과 해와 바람과 함께. 흙으로 돌아갈 때다. 영양가 많은 과거가 켜켜이 쌓인다. 물기 맺힌 과거 위에서 새로운 것들이 자랄 때다.
[습작 노트]
언니에게 연락이 온 건 11월 중순이었다. 크리스마스 파티에 올 수 있느냐고 묻는 목소리에 아쉽지만 올해는 못 갈 것 같다고 말했다.
“미안 언니. 나 일본 여행 갈 거라고 말했었잖아, 오빠가 그때밖에 시간이 안 돼서 어쩔 수 없었어. 미안.”
“그럼 신년 파티로 대체할까, 올해는?”
“아니야, 이번엔 우리 신경 쓰지 말고 재미있게 놀아. 일본에서 필요한 것 있으면 알려줘, 사 올게. 애들 선물도. 뭐 필요한지 물어봐줘.”
떠들썩한 파티라기보다는 두 가족이 모이는 저녁 식사 자리였다. 언니는 누군가를 돌보는 일이 적성에 맞는 사람 같았다. 엄마가 된 이후로 예전처럼 나를 자주 만나지 못한다고 생각해서였는지, 때마다 구실을 만들어 우리 부부에게 밥을 해 먹이는 걸 보람 있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알겠다고 말하는 언니의 목소리에 실망이 조금 묻어있었다. 내가 언니의 즐거움을 빼앗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전화를 끊으면서 나는 필요한 것 있는지 잘 생각해 보라고, 괜히 몇 번씩 당부했다.
먹는 일에 큰 흥미가 없는 나로서는 언니가 왜 그렇게 밥을 못 먹여 걱정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매일 애들 밥 하느라 피곤할 텐데 우리 밥까지 해준다는 것이 미안했고, 우리가 제대로 못 먹고살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아 불편하기도 했다. 하지만 더 불편한 일은 따로 있었다. 일부러 크리스마스에 맞추어 여행 계획을 세운 것은 불편한 일을 더 적극적으로 회피해 보겠다는 의도였다.
“정말 올해는 안 가도 될 줄 알았는데. 아니, 추석 때 봤잖아. 언니는 뭘 또 보자고 해서.”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괜히 아무 잘못 없는 언니 탓을 했다. 운전석에 앉은 남편이 손을 뻗어 어깨를 어루만졌다.
“괜찮을 거야. 몇 시간만 있다가 일어나자. 얼마 안 걸릴 거야.”
일본 여행은 진작 취소했다. 밍구가 수술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노견이 된 밍구는 관절이 성한 데가 없었다. 다행히 수술은 잘 된 것 같았다. 밍구는 집으로 돌아왔고, 금세 밝아졌다. 하지만 밍구를 다른 사람 손에 맡기기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남편과 나는 밍구가 회복하는 동안 곁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이건 이제 통과의례 같은 게 된 것 같아.”
“통과의례?”
“언니네 집에서 밥을 먹지 않으면 새해가 오지 않는 거야.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선 꼭 해야만 하는 일인 거지.”
남편이 웃었다. 회색빛 강물 위에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음악을 재생했다. 공기가 가득 실린 목소리가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눈이 쌓인 도시는 고요했다. 창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나도 모르게 노랫말을 따라 흥얼거렸다.
“노 스트레스, 노 스트레스*”
*Tycho, <No stress>
<다음화에서 계속됩니다>
《Hands in the dirt》, Leah Evans
《MR WUFFLES!》, David Wiesner
<No stress>, Ty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