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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사리 Jan 24. 2024

마지막을 꿈꾸는 너에게

취업이 되자마자 마지막 출근을 꿈꾼 적 있는지. 아무리 간절히 구직의 불안이 끝나기만을 바랐더라도 막상 취직을 하고 나면 곧바로 직업의 끝을 갈망하는 것이다. 대학생일 때는 대학을, 중고등학생이었을 때는 학교를 그만 다녀도 되는 날을 꿈꾸었으니 끝에 대한 갈망은 오래된 습관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오랜 습관 같은 것을 따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초등학교 2학년 무렵 반장선거날에 이르게 된다. 선생님이었는지, 반장 후보였는지, 누군가 앞에 나와서 말을 하고 있었는데 무슨 이야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흔들거리는 어금니를 혀 끝으로 건드리며 나는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 빨리 자라서 이가 그만 빠졌으면 좋겠다, 한 번에 전부 다 빠지는 편이 오 년에 걸쳐 하나씩 빠지는 것보다 낫지 않나, 하지만 아무리 그게 더 낫더라도 그렇게 될 리는 없다, 같은 생각 속을 둥둥 떠다녔다.


그렇게 끝을 바랐던 건 어쩌면 새로운 시작이 간절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저 자유를 갈망했던 것뿐이었는지도. 갈망과 끝과 시작, 그리고 다시 갈망하기를 반복하다 보니 대학생이 되어있었다. 대학에는 꽤 마음에 드는 제도가 하나 있었다. 그 이름에서는 시원한 바람이 대나무 잎을 스치는 듯한 소리가 났다. 휴학. 세상의 모든 자유가 휴학이라는 이름 속에 담긴 것 같았다. 휴학의 바람이 불어올 때 두 팔을 벌리고 거기 올라타면 어디든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람을 타고 뉴질랜드로 날아갔다. 망망대해에 홀로 떠있는 작은 섬에는 바람이 많이 불었다. 바람 냄새 맡으며 산책하길 좋아하는 씨제이는 그때 처음 만났다.


아무리 바라더라도 때가 되지 않은 한 끝나지 않는 것처럼, 아무리 간절히 붙잡고 싶어도 때가 되면 모든 것은 끝에 다다르고 만다. 그런 걸 보면 시간에는 눈과 귀가 없는 게 분명하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아무런 예외도 두지 않는 질서의 수호자라도 되는 듯 무심하게 제 할 일만 할 뿐이다. 앞을 향해 떠나가는 일.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그래서 다행인 건 마지막 유치가 빠지고 나면 더 이상 이 빠지는 공포에 휩싸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아닐까. 한 번 떠나간 시간을 다시 돌아오게 할 방법은 없으니까. 그렇다면 연재도 마찬가지겠다. 마지막 글을 발행하고 나면 연재는 끝난다. 간절히 원하든 원하지 않든 끝나고 말 연재라면 그만 간절해도 상관없는 일이다. 상관없는 일에 마음 쓰는 대신 지금 쓰는 글을 재미있게 쓰는 편이 나은 이유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씨제이를 다시 만났다. 처음 만났을 때가 2010년 무렵이었으니 시간이 흐르는 동안 씨제이는 나이 많은 개가 되었다. 얼굴을 덮은 짧은 털이 희끗희끗했다. 까만 눈으로 나를 알아보는가 했는데 이제 눈도 보이지 않고 귀도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탓에 아주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단다. 다른 개들이 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 집 앞에서 요란하게 짖어대도 경계하는 마음, 불안한 마음 없이 궁금한 냄새를 맡으며 즐거운 산책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난 금요일 밤 소식을 전해 들었다. 씨제이의 몸이 많이 늙어서 언제든 심장이 멈출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고. 그래서 수요일에(오늘) 작별하기로 했다고 한다. 크리스마스에 만난 씨제이는 즐거워 보였다. 불쌍한 얼굴을 하고 맛있는 것을 얻어먹는 데 성공하고, 다정한 손길도 듬뿍 받았다. 그것은 우리의 작별이었겠다.


작은 몸에 들었던 순수한 영혼을 위해 기도한다. 오래된 몸의 끝에서 빛나는 영혼이 태어나리라. 자유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새로운 시작이 두렵지 않길. 생의 마지막 여름날 나이 많은 개가 그랬듯, 요란한 소음과 두려운 형상에 휘말리지 않고 바람에 실려오는 궁금한 냄새를 따라 빛을 향해 걸어가길. 혼자가 아니라는 걸 기억하길. 그가 가는 길을 밝히기 위해 촛불을 하나 바친다.

 


[습작 노트]  

<지난 이야기(생생하게 깨어서, 진정을 다해서[클릭]​)​에서 계속됩니다>

  와인잔이 오고 가는 동안 음식이 비워졌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크리스마스 캐럴에 가끔 웃음이 묻었다.  
  “아빠 술 또 마실 거야?”  
  새 와인 병을 따려는 형부를 보고 지예가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서 괜찮아. 너도 선물 많이 받았지? 이게 아빠 선물이야. 알겠어?”
  지예가 입을 삐죽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형부는 와인을 잔에 따랐다. 언니가 형부의 팔을 툭툭 치며 눈짓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카들은 졸리다며 스마트폰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언니는 과일을 가져온다고 말하며 아이들 방으로 향했다.
  말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우리 셋에 비하면 형부는 할 말이 정말 많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글을 쓰면서도 아직도 하고 싶은 말이 더 남았는지, 와인이 줄어들수록 형부의 말주머니는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았다.
  “내가 얼마 전에 무슨 프로그램을 하나 봤거든? 그 백 톤이 넘는 트럭들 있잖아, 그걸 운전하는 이야기인데 그게 리얼리티 쇼 같은 거야. 트럭을 몰고 호주의 아웃백을 가로지르다가, 막 악어도 만나고 그러는 거야.”
  “트럭을 운전하다가 악어를 만난다고요?”
  대학생 때 호주에서 지낸 적 있는 남편이 말했다.
  “그래, 정말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간다니까? 그러니까 시청자들이 안 보고 배길 수 있나.”
  “트럭을 운전하다 악어를 만나는 일이 리얼리티라……”
  “요점은 그거야, 처제. 요즘 시청자들은 평범한 리얼리티는 원하지 않아. 뭔가가 있는 리얼리티여야만 한다는 거지. 그건 독자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래서 형부가 하려는 말은, 팔리는 책을 쓰려면 아웃백을 운전하다가 악어 정도는 만나야 한다, 이 말인 거예요?”
  “꼭 그렇다기 보단, 상징적이라는 거지. 기분 나쁘게는 듣지는 마. 처제 글들은 아무래도 좀 잔잔하잖아. 딱 봐도 여류 작가 티가 나잖아. 독자들이 원하는 건 갈등, 증오, 복수, 이런 것들 아닐까? 그런 것들이 악어를 마주치는 일과 같은 것 아니냐는 거지. 악어 같은 것 없이 내내 운전만 하는 이야기를 극소수의 독자들 말고는 누가 보겠느냐는 말이야.”
  나는 잔에 조금 남은 와인을 마저 비웠다. 입맛이 썼다. 손을 뻗어 와인병을 잡으려는데 남편이 말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밍구 저녁 약 챙겨야 해서,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가려고요? 과일 안 먹고?”
  언니가 주방에서 나오며 말했다.
  “그럼 이것 좀 싸줄게. 멜론 좋아하잖아. 잠깐만 기다려.”  

  “들었어, 아까? 여류 작가?”
  “형님이 오늘 평소보다 술을 많이 드신 것 같더라.”
  남편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형부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와인병에 손을 뻗던 나를 그가 제지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후회할 만한 일이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창문을 내렸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에 스쳤다.
  “맞아. 글 쓰는 게 쉬운 일이 아니야. 힘들겠지, 형부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듣기 싫은 의견이라고 해서 무시해도 되는 걸까. 술 냄새가 풍기는 말이라고 해서 진실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어디까지 수용해야 나를 잃지 않고 변화할 수 있을까.
  “내 글에 악어가 없는 건 사실인 것 같아.”
  남편은 웃기만 했다.
  “악어도 없고, 커다란 트럭을 운전하는 것도 아니야. 아웃백을 가로지르는 것도 아니고. 그냥 현대차를 타고 이렇게 강변북로를 달리는 글이야. 그뿐이야.”
  “맞아, 그건 당신 글이 아니야. 당신 글이 아닌 글을 당신이 고민할 이유가 있을까?”
  나는 운전하는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차창 너머로는 밤의 물결이 출렁이고 있었다. 그 너머에는 도시의 빛이 차곡차곡 쌓여 하늘까지 닿을 듯 높이 솟아있었다. 화려하게 불을 밝힌 순복음교회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내가 쓰고 싶은 건 악어 이야기가 아니야.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어. 악어가 득실득실한 세상에서도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잊지 않는 사람들. 악어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빛과 사랑을 향해 걷는 사람들.”
  “뭐라고 했어? 바람 소리 때문에 못 들었어.”
  “별 거 아냐. 취한 것 같아.”

  불편한 파티가 끝났다. 이제 새해가 올 것이다. 그렇다면 소중한 순간들 역시 언젠가 모두 지나갈 테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음날이 오겠지. 얼마나 불편했든, 얼마나 즐거웠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의 작은 현대차는 잘 닦인 강변북로를 미끄러지듯 내달렸다. 밍구가 기다리고 있는 우리의 미래를 향해. 불 밝힌 동작대교가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미래로 향하는 길이야,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끝>



고사리 그림  |  <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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