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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사리 Dec 27. 2023

구름 뒤에 가려진 보름달의 진심

수능이 끝나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예뻐지기 위한 일들이었다. 콘택트렌즈를 쓰기 시작한 것도 그맘때였고, 화장품을 사 모으고 옷과 신발을 새로 산 것도 전부 그즈음의 일이었다. 인천에서 그런 일들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곳은 부평역이었다. 지금 다시 부평역 지하상가에 가게 된다면 길을 잃을 게 분명한데도, 그 무렵 개미굴 같은 지하 세계를 자신 있게 쏘다닐 수 있었던 건 친구들과 함께였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온통 핑크색으로 장식한 화장품 가게에서 예쁜 플라스틱 케이스에 담긴 액체와 고체, 가루 류를 사들였고, 유행한다는 스키니진을 입어보기 위해 하반신만 남은 마네킹들이 앞을 지키고 선 청바지 가게로 향했다. 대학 합격 발표가 나기 전 특유의 어수선한 교실에서 어른 여자가 된 것처럼 스모키 메이크업에 대해 논하고 있던 어느 날 친구가 말했다. “여자가 귀걸이를 하면 1.5배 더 예뻐 보인대.” 그 말이 진짜인지 실험해 보기 위해 우리는 귀를 뚫으러 함께 부평역으로 향했다.


귀걸이를 전부 없앨까 생각한 지가 벌써 반년은 됐다. 귀에 뭘 달고 있으면 알게 모르게 좀 거슬리는 것도 있고, 무엇보다 그런 불편을 감수해도 1.5배 예뻐 보이는 것 같지는 않길래 고민하기 시작한 일이었다. 갖고 있는 귀걸이는 다섯 개. 별로 부피를 차지하지 않을뿐더러 금은보화는 아니어도 저마다 시엠립에서의 추억, 아테네에서의 추억 같은 것들이며, 특별한 순간들이 알알이 박혀 있었다. 그렇다 보니 영영 없애 버리기엔 어쩐지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퇴고를 하는 일도 비슷한 것 같다. 연재 첫 화에서는 네 문단이던 소설 습작이, 이제 다음 화까지 이어지는 분량이 되었다. 그렇게 소설의 분량이 늘어나는 걸 보는 재미에 겨우 머리를 짜내 쓴 문장을 걷어내기가 아까운 것이다. 버려도 될 것 같은 문장들을 귀에 달고, 목에 걸고 서있는 모양새가 꼭 어울리지 않는 스모키 화장을 하고, 불편하기만 한 스키니진을 고수하던 십 대 후반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기만 하다.


분량이 얼마나 되는지는 이제 소설을 쓰기 시작한 사람에겐 중요한 일이 아닐 테다. 아기가 생의 첫걸음을 내디딜 때 실제로 걸은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측정하려 드는 사람은 없다. 중요한 건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걷지 않던 한 인간이 이제부터 걷기로 결심하고 스스로 일어나 걸음을 떼었다는 사실이니까. 앞으로 할 일은 계속 조금씩 걷는 일, 그뿐이다.


내가 아닌 것을 덜어내고 덜어낸 뒤에야 진짜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문장 역시 마찬가지이리라. 진심을 덮고 있는 것들을 없애고 없앤 뒤에야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쓰고 싶은 글이 어떤 건지 알 수 있는 것일 테니.


버릴까 말까 마지막으로 귀에 달아본 귀걸이가 아무리 생각해도 어색하기만 하다. 1.5배의 어색함과 1.5배의 불편함이 양쪽 귀에 하나씩 매달린 것 같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단념하고 달았던 귀걸이를 뗀다. 가벼운 얼굴이 실제보다 더 예뻐 보이진 않아도 나답게 잘 어울려 마음에 든다.


[습작노트]

<지난 이야기(클릭)​​에서 이어집니다>

  파티 같은 건 이제 피곤했다. 나는 내가 도대체 이 톱니바퀴 속에서 뭘 하고 있는지 몰랐고,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혼란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다른 도시로 떠나야 할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던 어느 날, 카페를 찾은 크레이그가 말했다.
  “지수, 나 7월에 파티할 건데 네가 꼭 와줬으면 좋겠어.”
  나로서는 알아듣기 어려운 짙은 스코틀랜드 억양 때문에 두 번이나 물어 겨우 이해한 것이었다. 처음 만난 사람과도 쉽게 친구가 되는 크레이그를 볼 때마다 사람 좋다고 생각하긴 했었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저 단골손님이었기 때문에 초대를 받고 처음 들었던 생각은 ‘내가? 왜?’ 였다. 하지만 7월이면 아직 두 달도 더 남았으니 못 간다는 핑계를 댈 수도 없었다. 커피가 나왔다고 크레이그를 부르자, 그는 잔뜩 들떠서는 파티에 디제이도 올 거고, 뒷마당을 전부 전구로 장식할 거라는 계획을 설명했다.

  버스의 뒷문이 열리자 밖으로 보이는 건 스산하게 내려앉은 낯선 동네의 공기였다. 저 문 밖으로 뛰어내려도 정말 괜찮은 걸까 잠시 고민했다. 핸드폰을 켜서 지도를 열고 둥근 가로등 불빛 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어둠 속으로 들어가기를 반복하며 거리를 걸었다. 십 분 정도 계단을 오르고 언덕을 따라 올라 닿은 곳은 길이 좁은 주택가였다. 언덕길 양쪽으로 주차된 차들을 지나치는데 저만치 위에서 담장 너머로 노란 불빛이 새 나오는 게 보였다. 커다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베이스 소리가 밤공기를 울렸다. 핸드폰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아무리 수퍼히어로라고 해도 자기가 옳다고 믿는 정의를 다른 누군가에게 강요하는 건 폭력이라는 뜻이야.”
  게이트 앞에서 전자담배의 흰 연기를 내뿜으며 남자 둘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헤이” 하고 인사하자 노란 비니를 쓴 남자가 미안하다고 말하며 길을 비켰다.
  “우리가 어렸을 때 좋아하던 히어로들을 생각해 봐. 어쩌면 우리는 그 무렵부터 정의에 대한 왜곡된 가치관을 가지게 되는 건지도 몰라. 평화를 위한 전쟁, 정의를 위한 결투. 생각해 봐. 그래서 전쟁 후에 한 번이라도 평화가 온 적이 있었는지. 전쟁 뒤에 오는 것은 또 다른 전쟁일 뿐이고, 결투 뒤에 오는 것은 또 다른 결투야. 그런 것들이 시퀄이지.”
  남자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을 즈음 요란하게 내 이름을 부르며 크레이그가 나타났다. 파티의 호스트로서 한껏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생일 축하해, 크레이그!”
  그의 고조된 기분에 맞추어 목소리를 높여 인사했다. 그는 와줘서 정말 고맙다며 다정하게 안아주었다.

  크레이그가 고용한 바텐더가 카운터 위에 붉은 잔을 내려놓았다. 받아 드는데 얼음이 찰랑였다. 다시 낯선 사람들 속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어디에 가야 조용히 찬 바람을 피할 수 있을까 두리번거리다 마당 한쪽에서 붉은빛을 내며 서있는 야외용 난로를 발견했다. 이글거리는 오렌지 빛 아래에서 차가운 마음으로 파티에 온 수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던 그 밤, 그 소란한 틈에서 나는 완전히 길을 잃은 것만 같은 기분이 되었다. 내가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그저 톱니바퀴의 맞물린 움직임 속에서, 반복적인 파티 음악 속에서 어지럽게 돌고 돌 뿐이었다.
  “지수!”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믿을 수 없게도 제레미가 두 팔을 벌리고 서서 웃고 있었다.  
  “멜번으로 간 거 아니었어? 무슨 일이야, 여기서 널 만나다니.”
  “그건 굉장히 긴 이야기인 한데…… 아무튼 다시 돌아왔어. 혹시 여기서 널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정말 만나다니. 얼마 전에 카페로 한 번 찾아갔었는데 네가 그만두었다고 하더라고.” 그는 무슨 말을 더 하려다 말고 한 번 웃고는 눈썹을 만졌다.
  “기억나? 거대한 톱니바퀴들의 세계? 빙글빙글 돌아가는 사람들의 세계?”
  “그럼, 기억나지.” 제레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난로보다 밝게 웃었다. “기계이면서 유기체인 이상한 움직임의 세상.”
  “제레미, 나가자,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
  나는 얼음이 든 잔을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제레미는 별다른 질문 없이 나를 따라왔다. 게이트 앞에서 전자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나누던 남자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밤은 더욱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자갈을 밟는 제레미의 발소리가 몇 발자국 뒤에서 들려왔다. 음악 소리가 멀어질수록 심장 뛰는 소리가 커지는 것 같았다. 나는 발끝으로 자갈을 찼다.
  “봐봐, 저기, 보름달이야!”
  그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에서 구름이 걷히며 커다란 달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얀빛이 조용하게 세상에 내려앉았다. 가장 밝은 것을 둘러싼 어둠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 속에서 빛나는 하얀 구체를 다시 한참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영영 잊을 수 없는 순간이 되어버렸다는 걸 알아채고 말았다.



고사리 그림  |  <Magic> Inspired by Carl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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