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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사리 Dec 13. 2023

내가 가장 못생겼다고 믿던 아이에게


2023년 1월 1일이 어땠는지 어떤 기억도 남아있지 않아 조금 놀랐다. 아이패드를 열어 다이어리를 찾아보니 그날 나는 친구와 둘이 점심을 먹었던 모양이다. 그래 기억난다. 인도의 사원처럼 장식한 식당에서 인도의 전통 문양으로 장식된 구리 접시에 마치 어느 힌두교 신의 정원을 음식으로 구현한 듯 담아 나온 탈리*를 보고 우리는 감탄했었다. 그걸 보고 음식을 내 온 직원이 기분 좋게 웃었었다. 강황을 넣고 지은 노란 밥이 피라미드 모양으로 접시 한쪽에 서있고, 그 주변은 인도를 떠올리게 하는 선명한 주황, 빨강, 초록, 형형색색의 음식이 저마다 작은 구리 그릇에 담겨 꽃잎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기억난다.

 

다이어리 표지를 보니 과거의 내가 의미심장하게 써놓은 말이 있다. ‘나의 일상의 삶은 나의 영적인 삶과 동일하게 아름답다.’ 아마도 밥 하기 귀찮은 마음이 들어서 그렇게 썼던 건지도 모르겠다(그로부터 일 년이 흐른 지금은 밥 하는 걸 정말 좋아한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좀 더 작은 글씨로, ‘순수 말고 조화. 완벽 말고 전체’라고 써 두었다. 작년 이맘때의 내가 심어둔 씨앗이 잊고 있던 사이에 얼마나 자랐나 들여다보는 기분이다. 요즘 텃밭에 자라는 무를 볼 때 드는 마음이 꼭 이렇다.  


그런데, 다른 건 다 알겠는데, 저 마지막 구절 ‘완벽 말고 전체’는 무슨 생각으로 썼던 건지 정말 기억나지 않는다. 일단 완벽과 전체가 어떻게 대조를 이루게 된 건지 모르겠다. 과거에 살았던 한 인간이 남긴 기록을 해독하기 위해 고심하는 언어학자의 심정으로 나는 과거의 내가 쓴 문장을 들여다본다.


지난 4월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이런저런 메모가 모였다. 모였다기 보단 쌓였다고 해야 할 것 같긴 하지만. 초고와 수정본 같은 글들과 뒤죽박죽 한 데 묶인 거라고 쳐도 330 페이지가 넘었다. 올해가 가기 전에 쌓여버린 메모를 정리해야지 생각만 한참 하다가 드디어 손을 댔다. 심판에서 살아남은 메모도 있긴 하지만 수많은 메모가 ‘도대체 무슨 말인가’는 의문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한 채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삭제하고 삭제하다가,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이것도 삭제하려는데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 틈에 끼어 있는 ‘내가 가장 못생겼다고 믿던 아이에게’라는 말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의 나로서는 과거의 내가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심어둔 건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해변을 걷다가 모래밭에서 모서리가 모두 닳아 없어진 예쁜 색유리를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별 것 아닌 보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탈리(thali): 밥과 함께 난이나 로티 같은 납작 빵, 커리, 렌틸콩으로 만든 달, 삼발이나 처트니 등 소스 종류 두세 가지, 샐러드 같은 것들이 한데 나오는 음식.



[습작노트]

  “숨을 천천히 들이마십니다. 새로운 숨에 여러분의 온몸이 깨어냅니다. 내쉬세요. 이번엔 조금 더 깊게 들이마십니다. 모두 내쉬세요. 다시 한번 들이마시고 모두 내쉽니다.”
  원장의 목소리는 꿈결 같았다.
  “이제 천천히 돌아옵니다. 준비가 되었으면 눈을 뜨세요.”
  맨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꿈속에 사는 사람인 듯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앉아 있는 원장의 얼굴이었다. 삼십 대일까? 사십 대? 뭘 먹고 사는지 저런 몸매는 너무 비현실적인 거 아닌가? 게다가 아직도 저 초월한 듯한 미소에는 적응이 안 된다. 왠지 뱃속을 꺼림칙하고 불편하게 한 달까. 이상한 느낌이다. 그런데 지금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건 이상한 게 아닌가? 어쨌든, 그만 생각하는 게 낫겠다. 이런 생각은 치유에 도움 되는 게 아니니까. 그만.

  원장이 내미는 흰 종이를 받아 들었다. 그는 요가매트 위에서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는 사람들 하나하나에게 종이를 한 장씩 나눠주고 있었다. 잠시 후 앞으로 돌아온 그는 방 안의 다른 사람들과 같은 자세로 앉아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러분,” 저 사람은 원래 평소에 말하는 목소리가 저럴까? 아니, 집중. 그만. “우리의 내면 아이, 이제 우리가 지난 이틀 동안 함께 치유의 시간을 가지면서 보내줄 준비를 마친 그 아이에게 편지를 쓸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어떤가 살짝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대부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듯했다. 어떤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고, 저쪽 구석에 앉은 커트머리의 여자는 원장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렇게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이 다들 여지껏 내면 아이를 데리고 살았다는 게 좀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영 씨, 편지를 쓰기 어려우면 그림으로 그려도 좋아요. 서두르진 말아요. 시간은 충분합니다.”
  내가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슬쩍 미소를 흩뿌리고는 홀연히 뒤돌아 사라진다. 편지를 쓰기 어려우면 그림을 그리라고? 내가 아무리 치유가 필요해서 여기 왔다고는 해도, 그동안 쓴 논문이 몇인데. 괜히 억하심정이 되어 뚫어져라 한참 동안 흰 종이를 노려보다가 나도 모르게 순순히 편지를 써 내려갔다. 그건 사실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런 주제에 자존심을 내려놓지 못하고 가시를 세우기만 했던 게 부끄러워서가 아니었다. 그건 뭐랄까, 내가 떠나보내려는 내면 아이가 오히려 나에게 먼저 작별을 고하는 순간이었다고 표현해야 할까? 이제 괜찮다고. 나는 자랐다고. 혼자 갈 수 있다고. 그래서 내가 그 흰 종이 위에 써 내려간 것은 작별을 알리는 편지가 아니라, 내면의 아이가 보낸 작별 인사에 답장하는 편지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내가 가장 못생겼다고 믿던 아이에게’로 시작하는 그 편지는 아무것도 쓰지 않고 일 년 삼 개월을 보낸 뒤 처음으로 쓴 글이었다.

  아직 아홉 시 밖에 되지 않았는데 밖이 깜깜하다. 바람은 잔잔한 편이었지만 공기가 찼다. 초승달이 떴다. 손톱처럼 가늘다. 아니, 어쩜 저렇게 가늘고 뾰족하지? 그동안 달을 이렇게 자세히 바라본 적이 있던가? 고개를 있는 대로 꺾어 달을 올려다보았다. 뽀얀 입김이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연기처럼 흩어진다. 언제 다들 저기로 간 건지, 모닥불 근처에 사람들이 모여있다. 원장이 뭐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공기 중으로 뽀얗게 흩어진다. 패딩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무리 근처로 다가갔다. 사람들의 얼굴이 이상한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형형히 빛나는 얼굴로 원장은 두 손바닥을 가슴 앞에서 모으고 동쪽을 향해 절을 하듯 몸을 굽힌 뒤 기도의 말 같은 것을 읊기 시작했다. 바깥에서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마치 꿀이 흐르는 것 같던 실내에서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어쩐지 더 확고하고 진지하게 들려서 다른 사람 같았다.  
  “불의 신이여, 지혜의 아버지여, 오늘밤 초승달 아래에서 우리가 과거의 아이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바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원장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 틀림없다. 하지만 내 손에는 내가 쓴 게 분명한 글이 들려있지 않은가. 여기 오기 전까지는 정말 아무것도 쓸 수 없었는데 말이다. 어차피 오늘 밤이면 모든 게 끝나고, 나는 자고 일어나서 내일부터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계획 아니었나. 어쩌면 새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생각을 해야만 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원장이 하는 말을 계속 들어보는 수밖에. “……연기가 되어 성스럽고 높은 곳에 가 받아들여지기를 바랍니다.”
  원장이 기도를 마쳤다. 깜깜한 밤 초승달 아래 피워둔 모닥불 때문인지 분위기가 엄숙했다.  

  아까 편지를 쓰기 전에 원장의 말을 집중해 들으며 미소 짓고 앉아있던 커트머리의 여자가 제일 먼저 불 속에 편지를 바쳤다. 불이 크게 일렁였다. 순식간에 편지를 삼켜버린다. 그걸 바라보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여자에게 원장은 말했다.
  “보세요. 고개를 들어서 저기 날아오르는 재를 보세요. 지숙 씨의 편지가 하늘에 가 닿는 장면이에요.”  
  나는 불 속에 종이를 던져 넣었다. 재와 연기가 밤하늘로 날아오르는 장면을 놓칠세라 고개를 들어 넋 놓고 바라보았다. 내 몫의 작별 인사가 초승달과 모닥불과 겨울의 바람과 나무 타는 냄새와 누군가가 작게 훌쩍이는 소리 속에서 이 세상을 떠나고 있었다.



고사리 그림  |  <불> Inspired by Egon Schie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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