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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열 여행감독 Jan 06. 2021

그 겨울의 나주곰탕 한 그릇, 내 인생의 소울푸드

나주곰탕은 하얀집 노안집 남평할매집 등이 유명하다


2012년 대선이 끝나고 사흘쯤 지났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동신대 한의대 학생들에게 특강을 하기 위해 나주를 찾았다. 나주의 겨울은 황량했다. 단지 스산한 날씨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람들의 표정에서 깊은 절망이 읽혔다. 20년 전 김대중 후보가 졌을 때 한겨레신문 박재동 화백은 가슴이 뻥 뚫린 사람들을 그려서 광주시민들의 참담한 심정을 표현했는데 그 그림의 실사 버전을 보는 듯했다.     


전라도 출신인 우리 형제들은 명절 때 모여도 정치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슬쩍 표단속을 하는 형의 말이 끝난 뒤 이탈표의 조짐이 없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지역 사람 전체가 ‘정무적 판단’을 한다는 전라도 사람들의 특징이다. 2012년 대선 후에도 별 말이 없었다. 다만 문재인이라는 이름을 다들 가슴에 묻었을 뿐.       


강의실 안의 온도도 차가웠다. 특강을 하면서도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힘이 빠졌다. 그들에게 이 상황을 납득시키기도 쉽지 않았고 새로운 희망을 말하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다. 그저 사람의 병만큼 세상의 병에도 관심을 갖기를 호소할 뿐이었다. 하지만 내 말이 아무런 위로도 되지 못하고 아무런 희망도 제시 못했다는 것을 내내 어두운 그들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강의장을 나서는데 행사를 주최한 한의사가 국밥 한 그릇 먹고 가라며 차에 태웠다. 가볍게 날리는 눈발을 가르며 차는 국밥집으로 향했다. 거리는 한산했는데 국밥집은 제법 분주했다. '나주곰탕 하얀집', 나중에 그 집이 아주 유명한 음식점이라는 것을 알았다. 맑은 국물에 숟가락을 밀어 넣는데 뭔가 울컥했다. 뜨거운 국물을 털어 넣으니 뱃속 저 밑까지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철저히 그날의 기분 탓이었겠지만 음식이 힐링이 된다는 것을 온몸으로 체험했다.     


둘러보니 다들 그렇게 말없이 국밥을 삼키고 있었다. 무슨 의식을 치르는 것 같은 풍경이었다. 고요 속에서 오직 깍두기 씹는 소리만 허공에서 부딪쳤다. 다 먹은 사람들은 소리 없이 사라졌고 남은 자리에는 빈 발우처럼 국밥 그릇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군더더기가 없었다. 먹고 난 자리가 그렇게 정갈한 모습을 지금껏 보지 못한 것 같다. 그 빈 그릇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하얀집 곰탕은 전라도 양반가의 자존심을 엿볼 수 있는 음식이다. 정갈하고 담백하다. 나주곰탕으로 이름난 집이 많은데 이 집 곰탕이 유난히 맑다. 주인장의 설명에 따르면 좋은 머리고기 양지 사태 목심을 넣고 삶아서 우려내는데 비율이 중요하다고 한다. 재래식당으로는 드물게 오픈형 주방이라 국물 우려내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다. 식당에 들어서면 잔칫집에 온 기분이 난다.      


100년 전통의 식당이라는데 그동안 가족 간 갈등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바람결에 들은 적이 있다. 듣자니 잘 해결되었다고 한다. 나주 현지 분들은 이곳 말고 다른 나주곰탕집을 추천하기도 하는데 외지인인 나에게는 이곳도 충분히 맛있었다. 기대하는 맛 정도는 언제나 만족시켜 주는 집이다. 하얀집 외에 추천하는 집은 노안집과 남평할매집 등이다. 대체로 진한 국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노안집을 더 선호한다. 최근에 사매기곰탕에서 먹어보았는데 그 집도 괜찮았다.      


‘나주곰탕 하얀집’에서는 찬밥을 뜨끈한 국물에 토렴 해서 밥을 말아서 낸다. 워낙 정갈해서 먹던 밥을 넣었을 것 같은 의심 따위는 들지 않는다. 밥을 따로 먹으면서 국물을 떠먹는 것보다 이렇게 토렴해야 밥이 국물과 더 잘 어울린다고 해서 이렇게 놓는데, 어제 지은 식은 밥을 국과 내야 해서 궁리한 방식이라 한다. 아무튼 그냥 말아서 먹는 것보다 밥알의 느낌이 더 탱글탱글하다. 그 국밥에 잘 익은 김치를 올려서 먹으면 완벽한 궁합이다.     


날이 추워지니 나주곰탕이 더 생각난다. 서울의 레트로 곰탕으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그 정갈하고도 깊은 맛이 그리워진다. 올겨울에 나주에 한 번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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