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거실에 43인치 정도 되는 티브이가 한쪽 벽에 놓인 낮은 선반 위에 자리 잡고 있다. 거실을 안방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방 안에서 티브이가 차지하는 공간은 꽤 넓은 편이다. 티브이 속 검은색화면은 마치 별 하나 없는 무서운 우주 같아서 보고 있다 보면 중압감을 느끼곤 한다. 이 넓적한 티브이를 튼 적이 거의 없다. 드라마도 별로 안 좋아하고 예능도 딱히 관심이 없는 편이라 그런지 의도적으로 티브이를 봐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작년에 새집으로 이사할 때 보지도 않는 티브이를 짐짝 같아서 없애려고 했다. 그런데 웬걸 인터넷+티브이 결합 약정이 걸려있어서 정리하기 애매했다. 결국 새집으로 티브이를 들고 오긴 했는데 역시나 이사 온 뒤로 티브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티브이를 보지도 않는데 바보같이 돈을 뭐 하러 내고 있냐"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2가지 이유로 인해 티브이를 보고 있긴 하다.
첫 번째는 영화를 제대로 보고 싶을 때 티브이를 킨다. 올레티브이라는 인터넷티브이를 사용하고 있는데 여기에 등록돼 있는 영화가 꽤 많다. 그래서 보고 싶은 영화를 편하게 집중하면서 즐기고 싶은 경우 결제해서 보는 편이다. 넓은 화면과 나름의 고화질 영상 그리고 티브이 눈높이에 딱 맞는 흔들의자가 있어서 마치 작은 영화관처럼 몰입하면서 볼 수 있어서 좋다. 보통 아이패드로 보는 경우가 많아서 티브이로 보겠다는 결심은 두 달에 1번 있을 정도로 많지 않다. 이제 보면 티브이를 본다기보단 영화를 보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두 번째는 아버지가 집에 계실 때 티브이를 킨다. 명절 때 아버지는 시골에서 올라와 우리 집에서 지낸다. 친척이 집 근처에 계셔서 가깝기도 하고 누나들 집보다는 아들집이 편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 집에서 지내시는데 아버지가 오시면 방안에 티브이는 자기 전까지 늘 틀어져있다. 나와 반대로 아버지는 집안의 고요함을 적적하게 느끼시는 거 같다. 그래서 활기찬 티브이소리를 좋아하신다. 평일 저녁은 6시 내 고향, 생방송투데이 같은 걸 보시는데 보고 있다 보면 사람냄새가 나서 마음이 포근해진다. 걸어서 세계 속으로, 다큐멘터리 3일, 내셔널지오그래픽 같은 다큐를 좋아하시는데 같이 앉아서 보고 있다 보면 다양한 세상을 보는 재미도 있다. 그걸 보면서 아버지랑 대화를 몇 마디 나누는 게 소소한 일상이 아닐까 싶다.
나는 거실에 울려 퍼지는 티브이소리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 거실에 있는 책상에 앉아서 이것저것 하는 편인데 그럴 때마다 귀에 들어오는 티브이소리 때문에 자꾸만 고개가 티브이로 향하게 된다. 마치 경기도버스에 달린 소리 없는 티브이가 내 시선을 잡아 끄는 것과 비슷하다. 보고 싶은 건 아닌데 자꾸 시선을 뺏기게 된다. (그래서 나는 버스에 앉을 때면 영상자리가 눈에 띄지 않는 왼쪽 뒷자리를 좋아한다.) 거실에서 쉴 때면 티브이를 보고 있지 않아도 티브이가 나를 방해한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티브이소리가 계속해서 귀에 들려오니깐 신경 쓰이기도 하고 고요함이 사라졌다고 해야 하나 거실에서 쉬어도 쉬는 거 같지 않아서 그럴 때면 작은방으로 들어가서 쉰다.
가만 보면 티브이는 시간감각을 잊게 만든다. 쉴 틈 없이 재생되는 재방송이 시간개념을 상실한다고 해야 하나 하루 종일 돌아가는 세탁기를 옆에서 보고 있으면 가슴속에 답답한 기분을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 내가 청각이 엄청 예민한 사람이라는 걸 아버지가 올라올 때마다 아주 잘 느끼고 있다. 그래서 아버지가 다시 시골로 내려가시고 나면 집안이 정말 고요하다. 아버지가 없어진 빈자리가 쓸쓸하기도 하고 사람 냄새나는 티브이 소리가 그립기도 하면서도 한 편으론 조용한 집이 좋기도 하다. (독립에서 느낄 수 있는 오감의 자유가 아닐까.) 아버지에게는 미안하지만 좋은 건 좋은 거니깐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는 어렸을 적 티브이와 친하게 지냈다. 그것도 아주 상당히 말이다. 중학교 3학년때까지 섬에서 자랐다. 스마트폰이 중학교 3학년 겨울쯤에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 집에서는 할 게 많지 않았다. 그래서 컴퓨터와 티브이를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는데 아침 등교하기 전에 도라에몽이나 뉴스를 봤었고 하교하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티브이를 트는 게 일상이었다. 컴퓨터 게임을 하면서도 티브이를 배경음악처럼 틀어놓기도 했었다. 채널을 넘나들면서 애니와 게임방송, 영화, 드라마, 예능, 연속극 등 다양하게 봤다. 시간 가는 줄 모를 만큼 재밌었다.
특히 주말에 집에 있을 때는 쉴 틈 없는 재밌는 방송이 쏟아졌다. 무한도전이며 스펀지, 1박 2일, 영화가 좋다, 동물농장, 주주클럽, 신비한 tv서프라이즈 등이 나를 티브이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일요일 밤에 하는 개그콘서트가 끝나면 "아 주말이 진짜 끝났구나 내일 월요일이다.."라는 걸 온몸으로 아쉬워하면서 잠을 청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랬던 시절을 생각하면 누구보다 티브이를 보면서 웃고 떠들고 한 몸처럼 붙어살았는데 지금은 헤어진 연인처럼 그때의 정을 그리워하는 것도 잊어버릴 만큼 매정한 관계가 되었다는 걸 다시 깨닫다 보니 기분이 약간 묘해졌다.
생각해 보면 티브이는 늘 그대로였다. 예능이 끝나면 다른 예능이 새로 시작했고 드라마도 똑같이 다른 드라마가 여전히 새롭게 대체되고 있다. 그냥 내가 변한 것이다. 내가 티브이와 멀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고요함이다. 지금의 나는 고요함을 좋아한다. 예전에는 조용함을 좋아하지 않아서 음악을 듣거나 티브이를 틀어놓곤 했는데 이제는 그게 시끄럽고 산만하다고 느낀다. 지금은 온전히 한 가지에 집중하고 싶은 마음이다.
티브이는 수동적인 콘텐츠다. 티브이에는 정해놓은 편성표가 있다. 내가 임의로 골라서 채널을 보긴 하지만 편성표 안에서 시간대에 골라진 것을 맞춰서 보는 것이다. 뭐랄까 보고 싶어서 본다기보단 그럴 수밖에 없어서 본다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이 싫었다. 그리고 쉴 틈 없이 쏟아지는 광고와 볼 게 없을까 하고 뒤적거리던 행동이 내 정신을 못살게 구는 것 같기도 하고 시간을 허비하는 기분이 느껴져서 별로 보고 싶지 않았던 거 같다. 그런 면에서 광고도 덜 하고 능동적으로 볼 수 있는 콘텐츠가 많은 유튜브 시대인 지금 티브이의 점유율이 떨어지는 건 당연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젊은 사람들에게 멀어진 티브이는 점점 어르신들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는 건 당연한 이치가 아닐까.
내가 티브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티브이가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여전히 티브이를 보는 사람은 많기 때문이다. 그저 라디오와 티브이가 있던 시절에서 티브이, 라디오, 유튜브, OTT로 바뀐 것뿐이다. 또한 아버지처럼 적적함을 달랠 티브이가 필요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가정에서 함께 티브이를 보면서 무언가를 공유하고 수다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하기도 할 것이다. 티브이의 역할이 예전보다 많이 퇴색된 건 사실이지만 적어도 나한테는 티브이가 필요한 삶이 아닌 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