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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나의 딸들이 논개가 되지 않기를 소망한다

논개는 관기가 아니라, 몰락한 양반가문의 딸

by ED가되고싶은디 Dec 28. 2024

이번 한국 방문에서 진주성 박물관을 방문했고, 논개가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한 촉석루를 방문했다.


논개는 진주의 관기로 잘못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몰락한 양반가문 출신으로 1593년 6월 일본군에 맞서 진주성을 지키다 순국한 의병장 최경회 (사망 당시 61세) 의 둘째 부인 (사망 당시 19세) 이다.  즉 42세 차이가 나는 장군의 둘째 부인이었고, 단지 남편의 복수를 위하여 적장을 죽이기 위하여 관기로 위장하여 연회장에 참석한 것으로 알려진다.


논개(論介, 1574년 ~ 1593년) 또는 주논개(朱論介)는 조선 전라도 출생으로 1574년 선비 주달문(朱達文)과 부인 밀양 박씨 사이에서 반가(班家, 양반의 집안)의 딸로 태어났으나 만 4세에 부친의 별세 후 숙부 주달무의 집에 의탁되었다. 가산을 탕진한 숙부가 벼 50석에 김부호(金富豪)의 집에 5살의 논개를 민며느리로 혼인시키려 하니 이를 피해 어머니와 경상도 안의현(현재의 경상남도 함양군)의 친가로 피신한다. 그러나 혼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녀는 1579년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때, 장수현감 충의공 최경회(崔慶會)의 명판결로 모녀를 석방시키고 모녀는 현감의 관저에 의탁하며 잔심부름등을 하며 지내다가, 후일에 최경회가 성년이 된 논개를 후처로 맞아 들였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최경회가 전라 우도의 의병장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병사를 훈련할 때 논개는 이를 도우며 보필하였으며, 1593년에 최경회가 경상우도(慶尙右道)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논개는 진주로 동행하였다. 이후 6일간의 전투 끝에 진주성이 왜군에 함락되고 최경회는 다른 의병장들과 함께 남강에 투신한다. 이에 논개는 남편의 죽음의 복수를 위해  적장을 죽이기 위해 관기로 위장했으며, 축석루에 서서 왜장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가녀린 몸으로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하기 위해 반지 10개를 끼는 치밀한 준비를 하고, 거친 파도 위의 바위에 서서 그를 기다린 후에 끝내 그와 자신을 죽일 수 있었다.


나는 사피엔스를 읽고 진주성에 방문했기에 여러가지 생각을 할 수 있었고, 그 생각을 정리해 보고 싶었다. 사피엔스 책 중에서 크게 공감한 문구 중 하나는, 인지 혁명 - 농업 혁명 - 과학 혁명을 지나며 호모 사피엔스 종은 번영을 거듭했지만 (즉 다른 포유류 혹은 다른 동 식물 종에 비해 압도적인 인구수의 증가) 그 과정에서 오히려 노예화(?)된 개개인의 행복이나 웰빙은 오히려 감소했다는 부분이었다.


이 인사이트는 국가에도, 커뮤니티에도, 가족에도 똑같이 적용 가능하다.


이 진주성전투를 처음부터 차근히 살펴보자. 내 생각에 진주성 전투는 소수의 잘못된 결정으로 다수의 죽음이라는 결과를 가져온 슬픈 역사인 것 같다. 그리고 논개는 그 슬픈 역사 안의 슬픈 개인일 뿐이다.  난 궁금하다. 과연 논개는 이 진주성전투가 피할 수 있는 전투였다는 것을 알았을까?


1593년 왜군과의 전쟁이 휴전기로 접어들면서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강화회담이 있었는데 그 결과 일본군은 북부 및 수도권 지역에서 철수, 남해안까지 물러나기로 했다. 그럼에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과정에서 복수심에 일본군 전군에 1592년 큰 패배를 당했던 진주성을 공격할 것을 명령한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번 공격은 보복전의 성격으로서 태합의 명령이 절대적이라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며 도저히 조선측에 승산이 없으니, 차라리 진주성을 비워놓으면 일본군이 일시점령했다가 물러갈 것이라 충고까지 해 주었다. 명군은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수성을 포기하라고 권고를 했으며 곽재우와 선거이, 홍계남 등 조선군 장수들조차도 진주 근교까지 갔다가 10만 대군을 보고 도저히 무리라고 판단하여 진주를 포기했다. 하지만 진주에 주둔하고 있던 방어사 황진 및 의병장들은 조정과 명군의 권고와 일본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진주에 남아 싸울 것을 결의했다.  (난 여기서 "왜???" 라고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6일만에 패했고, 의병장들을 믿고 진주성을 함께 지켰던 (논개를 포함한) 6만명의 백성들은 다 죽게 된다. 이런 설명은 진주성 박물관에 나와있지 않고, 오로지 진주성 전투를 칭송하기에 여념이 없는데, 1593년 진주성 전투가 과연 올바른 결정이었고 가치있는 죽음이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왜군은 전투 전에 통보했던 대로 진주성을 점령만 한 뒤 전라도로 진격하지 않고 동쪽으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논개가 어떤 마음으로 19살의 꽃다운 나이에 관기로 위장하고 거친 파도 위의 축석로에서 왜장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논개가 어떤 마음으로 5살 때 본인을 팔아넘긴 숙부를 생각했을지, 그리고 그녀와 어머니를 살려준 최경회와 그 가족을 섬겼는지, 그리고 성인이 되었을 때 42살의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그의 후처로 들어갔는지 나는 모른다.  무엇보다, 논개가 진주성전투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나는 모른다. 나는 잘 모르지만, 그녀에겐 분명 충성심과 용기와 강직한 성품이 있었지만 충분한 정보에 대한 access 와 비판적 사고능력은 부족하지 않았을까 막연히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나의 딸들이 절대로 논개와 같은 삶은 살지 않기를 소망했다. 다행히 지금은 논개가 살았던 대와는 비교 할 수 없는, 개인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시대다.


나는 나의 딸들이 눈을 가린듯한 맹목적인 충성심으로 돌진하지 않기를, 집단주의적 사고를 하지 않기를 소망했다.


이 시대 무분별한 SNS, 인터넷 에서의 잘못된 정보는 걸러 들을 수 있고, 올바른 정보를 찾아서 흡수할 수 있는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지성을 갖기를 소망했다.  


나는 나를, 그리고 나의 딸들을 그렇게 기르기로 결심했다.


잘못된 시대에 태어난 논개에게 한 줌의 위로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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