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서 마주 앉은 네 명의 사람들이 모두 각자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을 보며, 나는 문득 '침묵'이라는 것의 의미가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의 침묵은 말 그대로 아무 소리가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의 침묵은 다르다. 수많은 메시지와 알림음, 화면을 터치하는 소리들로 가득 찬 침묵이다.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대화다. 물론 사람들은 여전히 말을 한다. 어쩌면 예전보다 더 많은 말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말들의 깊이가 달라졌다. 마치 연못이 넓어지면서 얕아진 것처럼.
얼마 전 동네 카페에서 우연히 옆 테이블의 대화를 들었다. 두 친구가 만나서 근황을 나누는데, 대화가 3분을 넘기지 못했다. "요즘 어때?" "그냥 그렇지 뭐." 그리고는 각자 핸드폰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함께 있지만 함께 있지 않은, 그런 이상한 동행이었다.
나는 가끔 어린 시절 외할머니와의 대화를 떠올린다. 외할머니는 말수가 적은 분이셨지만, 한 번 입을 열면 긴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젊은 시절 이야기, 그리고 인생에 대한 철학까지. 그 이야기들은 마치 깊은 우물 같았다. 한 번 들어가면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고 어두웠지만, 그 안에는 맑은 물이 있었다.
요즘 사람들의 대화는 반대다. 넓고 밝지만 얕다. SNS에서 하는 대화들을 보면 더욱 그렇다. 수백 명과 동시에 이야기를 나누지만, 정작 깊은 교감은 일어나지 않는다. 마치 큰 광장에서 외치는 것 같다. 목소리는 멀리 퍼져나가지만, 누가 듣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린 시절 자주 갔던 이발소의 50대 아저씨와 나누는 대화는 독특했다. 머리를 깎는 30분 동안, 우리는 날씨부터 시작해서 학교 이야기, 친구들 이야기, 심지어는 장래희망에 대한 이야기까지 했다. 그 대화에는 특별한 목적이 없었다. 정보를 얻으려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를 증명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대화를 위한 대화였다. 그런 대화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나는 지금에야 깨닫는다.
대화가 사라져가는 건 단순히 기술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우리가 점점 '효율성'에 중독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는 목적이 있어야 하고, 결과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시간 낭비라고 여긴다. 하지만 정말 쓸데없는 이야기일까?
어제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할머니는 내게 갑자기 말을 걸었다. "요즘 날씨가 참 이상하네요." 나는 처음에는 당황했다. 모르는 사람과 대화를 나눈 지가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분간 그 할머니와 날씨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묘한 따뜻함을 느꼈다.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고, 다시 만날 일도 없을 사람과의 순수한 대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었다.
대화의 본질은 정보 교환이 아니라 '존재 확인'인 것 같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 당신도 여기 있다는 것을 서로 확인하는 과정. 그런 확인 작업 없이는 우리는 점점 투명해져 간다. 마치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처럼, 보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너머의 풍경에 묻혀버리는 것처럼.
동네 작은 서점에서 일하는 사장님과 나누는 대화들을 생각해본다. 책을 고르러 갔다가 어느새 한 시간이 넘도록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책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인생 이야기까지, 아무런 목적 없는 대화들. 그곳에서는 아직도 사람들이 서로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눈다. "이 책 어때요?" 같은 질문에서 시작해서 작가에 대한 이야기, 삶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한다. 그런 대화들은 대부분 기억에 남지 않는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우리는 모두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존재들이다.
사라져가는 대화들을 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혹시 우리가 너무 많은 것을 동시에 하려고 하는 건 아닐까? 대화를 나누면서도 다른 일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다음에 할 일을 계획한다. 그러다 보니 정작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진짜 대화는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을 준다. 상대의 말에 완전히 집중하고, 내 대답을 차근차근 생각하고, 침묵마저도 함께 나누는 것. 그런 대화 후에는 묘한 충만감이 남는다. 무언가를 주고받았다는 느낌,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는 안도감.
밖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괜찮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지만, 이 글을 통해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대화하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있다면, 그 순간 우리는 시간을 초월한 대화를 나누게 될 것이다. 그런 대화도 나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