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십 년 천권 : 책 속으로 풍덩
어릴 때부터 책 읽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눅눅한 다락방 한 구석을 가득 채운 계몽사에서 만든 동화책은 닳고 닳을 때까지 읽었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책장은 힘없이 쓰러졌고, 오래전에 출판된 책이라 글자들은 작고 흐릿했다.
컬러는 꿈도 꿀 수 없었다. 흑백의 가느다란 펜으로 그려진 삽화가 아주 가끔 등장할 뿐이었다. 읽을 만한 다른 마땅한 것이 전혀 없었다. 매일 집으로 오는 신문은 너무 어려웠고, 그나마 쉬운 반상회보는 한 달에 한 번 그 양도 몹시 적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읽을 책은 더 많았다. 국어 시간에는 책을 잘 읽는다고 곧잘 일어서서 낭독하기도 했다. 낡은 도서관도 가끔 찾았고, 글을 쓸 수 있는 백일장도 은근히 기다렸다. 친구들끼리 모여 연극도 준비해 보고, 동요도 같이 부르며 참으로 해맑은 시간을 보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딱 거기까지였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책은 저 바다 건너 머나먼 땅으로 흘려보냈다. 교과서도 물론 참고서 자습서 일절 보지 않았다. 뽀로로도 없던 시절이었는데 노는 게 제일 좋았다. 정말 주야장천 놀았다. 그렇게 노니 책을 손에 쥘 시간 또한 전혀 없었다. 그나마 책 대신 손에 쥔 것은 잡지였다. 록 메탈 음악 잡지, 묵직한 영화 잡지를 번갈아가며 읽었다. 음악과 영화를 좋아하니 음악잡지 혹은 영화잡지의 기자가 되고 싶은 꿈도 생겼다. 그리고 순식간에 대학까지 졸업했고 또 어영부영 사회인이 되었다.
간절할 만큼은 아니었지만, 여차저차 프리랜서로 음악 잡지 디자이너로 3년 가까이 일을 했다. 한 달에 고작 사흘을 출근하는 일이었지만, 바쁜 마감을 함께 즐기며 잡지를 만드는 쾌감에 흠뻑 취했던 시절이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대학에서 배운 디자인 툴이 큰 도움이 되었다.
착한 사수 누나 덕분에 FM으로 배울 수 있었고, 손이 빠르다는 장점 하나로 밀어붙였다. 정말 하고 싶은 건 기자 일이었지만 그럴 주제는 못됐다. 좋아만 했지 그걸 글로 푸는 방식은 전혀 몰랐던 시절이었다. 그런 연유로 잡지 크레디트에 디자이너로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하고 싶은 건 기자인데 디자인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이 우스꽝스럽고 속상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몇 개의 잡지를 더 만져보는 값진 경험을 이어 나갔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아주 유명한 잡지도 있고, 아무도 모르는 음지에서 만들어지고 늪 속으로 사라진 잡지도 있었다. 몹시 배고프던 시절이었지만, 돌이켜보면 그 어떤 이해관계없이 열정 하나만으로 경험할 수 있는 20대 시절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책과 더불어 잡지마저 손에서 놓고 말았다.
이후 몇 년 동안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거짓말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자주 가던 동네 헌책방은 그사이 소리도 없이 사라졌고, 머릿속으로 떠올리면 약도까지 그릴 수 있는 인근 서점들마저 하나둘씩 사라졌다. 종로 전체를 여전히 아지트로 삼았던 시절, 약속이라도 잡을 때면 교보문고를 잠시 들렀지만 책 한 권 내 돈으로 사지 않았다. 잠시 시간을 때우는 곳. 단행본 보단 잡지 몇 개 넘겨보고 말았던 곳. 왜 그랬을까 싶을 정도로 그때는 그랬다.
그리고 도서관을 만나게 되었다. 놓고 있었던 책이 다시 내 손에 쥐어졌다. 찹쌀떡이나 인절미 먹을 때 입천장에 떡이 찰싹 붙듯, 내 손에 책이 접착제 발라놓은 것 마냥 붙게 된 것이다. 스스로도 이러다 말겠지 싶어 했다. 뭐 어떻게 대출카드 만들고 책을 읽기 시작은 했으나, 얼마나 가겠어하며 반신반의했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고 1년이 흘러갔으며 어느새 10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제는 자주 찾는 구립도서관을 비롯해 동네 곳곳에 있는 작은 도서관까지 머릿속에 선명하다. 도서관들은 저마다의 주제와 성격을 수시로 뽐내고 있다. 유딩부터 초딩 중딩 고딩 대딩 직딩 그리고 동네 아줌마와 아저씨 어르신들까지 다양하게 흡수하고 기다리고 있다. 나도 아내도 두 아이도 모두 흡수되어 보았고, 찾아가고 있다.
더 많은 도서관이 생기길 바라고, 사라진 헌책방과 동네 서점들이 다시 부활하길 바라는 마음은 나만의 헛된 꿈은 아니겠지. 발 벗고 나서서 무언가를 해도 좋겠지만, 마땅히 떠오르지 않아 우선 당장은 책을 읽어야지 싶다.